대산루 담을 끼고 하얀 꽃을 흐들러지게 핀 백목련
1750년 영조대 사패지에 건립된 우복 선생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96호)
우복 선생이 우산에 거처하면서 1603년에 건립한 별서 대산루
남방계 식물로 알려진 개비자나무가 종택에 심어져 있어 이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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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관목으로 키운는 것과 달리 자연형으로 크게 자라고 있는 박태기 대구보다 개화가 보름정도 늦은 것 같다.
우복 정경세 선생과 별서(別墅) 대산루의 백목련
본관이 진양(晉陽, 진주의 고호)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는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서 아버지 정여관(鄭汝寬)과 합천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창석 이준(李埈), 사서 전식(全湜)과 더불어 상산3로(商山三老)로 불리고, 서애(西厓) 유성룡,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과 함께 “영남오현(嶺南五賢)으로 자리매김 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文臣)이다. 여말 감찰어사와 상주 판관을 지낸 정택(鄭澤)의 10세 손이다.
가학으로 기초를 다지고 1580년(선조 13) 18세에 상주 목사로 재임 중이던 서애의 제자가 되어 1586년(선조 19)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어 예문관 검열 등 청요직(淸要職)을 거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0년(선조 23)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낙향하여 시묘(侍墓)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적이 상주성을 공격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외남 안령(鞍嶺)에서 대치하던 중 어머니와 아우를 잃고 본인도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창의장 이봉(李逢) 참모가 되어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조달했다.
1594년(선조 27) 홍문관 수찬으로 경연에 나아가 주역을 강론하여 왕과 대신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1598년(선조 31) 36세 되던 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져 있었으며 특히, 경상도는 왜군 북상 길목이어서 피해가 더 컸었다. 그러나 불과 7개월이 지났을 무렵 대북파의 전횡으로 스승인 서애가 실각 되자 1600년 (선조 33) 사직하고 낙향했다. 우산에 은거한 3년 되는 1603년 (선조 36) 초가 청간정(廳澗亭, 일명 계정)과 대산루를 짓고 가족이 이주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상주우복종택(국가민속문화재 제296호)은 그의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750년경 (영조 26) 송준길의 증손 송요좌(宋堯侳, 1678~1720)와 관찰사 민백상(閔百祥)이 조정에 건의하여 남북 10리, 동서 5리 약 1,000여 정보의 땅을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 준 땅)로 받아 5대손 정주원(鄭冑源, 1738~1816))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후 1607년(선조 40) 대구 부사로 나가기 전까지 7년여를 우복산장(愚伏山庄)에서 보내며 청송 부사, 예조 참의 등의 부름이 있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우복의 대구 부사 재임은 1년이었다. 그러나 스승 서애(西厓)가 돌아가시고 선조가 승하하였으며 광해군이 등극하는 기간이었다. 이런 격변 속에도 왕이 지켜야 할 덕목을 강조하는 무신소(戊申疏)를 올려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원익 등의 간청으로 벼슬을 박탈당하는 데 그쳤다. 이후 동지하절사로 명나라를 다녀오며 화약 수입을 배로 늘렸다.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동방 오현을 문묘에 배향하고 전라도 관찰사로 나아갔으며 서울을 교하로 옮기자는 주장에도 반대했다. 1613년(광해군 5) 강릉 부사로 나아가 치적을 쌓았다. 이어 무고를 받아 1616년(광해군 8) 광해군이 폐위되는 1622년(광해군 14)까지 6년간 낙향하여 은둔했다.
다시 조정에 출사한 것은 61세 되던 해 1623년 (인조 원년)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홍문관 제학, 승정원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 겸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고 1633년(인조 11)에 별세했다. 문장(文莊)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개령의 덕림, 강릉의 퇴곡서원 등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우복집』이 있다.
동춘당 송준길을 사위로 맞아 당쟁의 폐단을 시정 하려 했고 대사헌, 이조판서로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국내 최초의 사립 의료기관 존애원, 도남서원 건립 등 향리 상주를 위해서도 힘썼지만, 대구를 위해서도 많은 공적을 쌓았으니 대구지역 사림의 공의로 연경과 고산 두 서원에서 배향되고, 고산서원 경내에 강학비가 세워졌으며 가뭄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위해 기우제를 지낸 것도 모자라 둔동제(屯洞堤, 수성구 녹원멘션 부지에 있던 못)를 축조하여 영세불망비가 건립되었다. 이 빗돌은 못을 매립하는 과정에 두 동강 난 채 발견되어 정관 전 교육대학 총장에게 알려지고 정 총장이 경북대학교 윤용진 박물관장에게 기증하고 (현재, 야외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음) 하나를 더 복제하여 경상감영공원 비림에 두었다. 정유재란을 앞둔 1596년(선조 29)에는 팔공산 상암 회맹(會盟) 32명 중 한 분으로 참여했다.
상주에서 유일한 국가민속문화재 우복종택은 시인이자 기업가인 후손 정훈(鄭壎) 지우의 초대로 처음 가보게 되었다. 지난 이른 봄에도 찾았다. 전통 가옥의 조경 식물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안채의 개비자나무와 별서의 큰 박태기나무가 특이하게 다가왔다. 개비자나무는 남방계 식물로 기후 온난화 등으로 북상 중인데 조선 후기 종택을 지으며 야생을 채취(採取) 집안에 심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때 이미 이곳까지 북상한 것을 알 수 있고, 관목인 박태기나무를 자연상태로 키워 꽃이 피면 장관일 것을 상상하며 다시 와서 꼭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대구에서 박태기나무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다시 먼 길을 찾았더니 이제 겨우 꽃망울만 맺고 있어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백목련이 가지가 늘어질 정도로 꽃을 달고 별서를 환하게 밝히고 있어 이 역시 환상적이었다. 백태기를 보지 못한 실망을 백목련의 황홀한 자태로 만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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