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군수로 재직하다가 을사늑약이 채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향산 윤상태 선생
1915년 일제 강점기 향산을 비롯한 일단의 독립운동가들이 시회를 가장해 독립운동을 모의 했던 안일사
달서구 달비골에 있는 향산의 별서 송석정 그는 이곳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자주 회홥을 가졌다.
향산이 심은 배롱나무
그는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심은 붓꽃은 텅빈 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어 감회에 젖게한다.
대구는 뿌리 깊은 도시답게 자랑스러운 인물이 많다. 이분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달구벌에 발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귀감(龜鑑)으로 삼게 하여 자긍심을 높이고 싶었다.
그러나 짧은 지식과 정보 부족으로 그렇게 하지 못해 늘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향산(香山) 윤상태(尹相泰, 1982~1942)도 그런 사람의 한 분이었다. 『달구벌, 대구시, 1977』에 의하면 "1915년 1월 15일(양력, 2, 28) 안일암(현, 앞산 안일사)에서 서상일 등 일단의 인사들이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단군을 봉사(奉祠)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단체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回復團中央摠部)"를 결성했다.
대구는 지방의 한 도시일 뿐인데 “조선(朝鮮)”이라는 전국을 아우르는 이름을 붙인 것도 예사롭지 아니하지만, 조직도 중앙정부의 내각과 비슷하고, 특히, 결사 대장이란 부서를 둔 것을 보면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즉 “통령(統領) 윤상태,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서병룡), 유세부장 정순영, 권유부장 김규, 결사대장 황병기, 역원 이형재, 김기성, 마산지부장 안확 등이며 이들은 만주, 러시아, 만주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와 연계하여 연락은 서상일, 이시영, 박영모 등이 취했으며 윤상태는 1919년 창원에서 주민 1천여 명을 동원해 진동주재소(현, 파출소)를 습격하려다가 미리 연락받는 일본헌병대와 부딪혀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고 하였다.
이들 중에서 특히, 통령 윤상태가 눈길을 끌었다. 회장이나 대표라는 직함을 두고 통령(統領)이라는 직위를 맡은 분이자, 대구가 아닌 창원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대구가 기리는 것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월배 사람이며 달비골에 그와 관련된 유적이 있다는 것 이외 다른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매일신문(2018년 5월 18일)의 책 소개 편에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 (저자 윤이조)』를 읽고 오래 잊혀있던 그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조두진 기자의 서평은 더욱 흥분하게 했다.
저자 윤(尹)은 향산의 손녀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일화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월배지역의 이야기, 가족에 대한 추억을 기리고 있으며 향산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을 부록으로 정리해 두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 전화했더니 아직 시판에 들어가지 않아 입금하면 우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책이 도착하기 전 우선 『월배향토지 (월배향토지편찬위원회, 2006)』에서 향산에 대한 기록을 다시 찾아보았다. 경북 고령의 일신학교에 이어 월배에서 덕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을 한 이외 달비골의 송석헌(松石軒)에서 동지들과 국권 회복을 모의했으며 월배육경(月背六景)이란 시를 남겼다.
송석헌을 찾았다. 풀을 헤치고 힘겹게 들어서니 현판이 세심정(洗心亭)이었다. 잘 못 찾은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책이 배달되어 몇 쪽을 살펴보니 공교롭게도 정인열 논설위원의 독후감도 수록되어 있었으며 송석헌이 곧 세심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 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향산의 유허지 송석헌을 가보았다고 했더니 반가워하며 같이 가보자고 했다. 송은석(향토사학자)을 동행해 다시 현장을 찾았다.
저자 윤이 어린 시절 자주 놀러 왔으며 그의 기억 속의 큰 바위와 느티나무, 보기 좋게 가지가 굽은 백일홍 두 그루, 돌담과 첨운재(瞻雲齋)와 송석헌(松石軒)이라고 쓰인 현판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연못과 맛있게 따먹었다는 자두나무는 없었으며 다만 앵두가 빨갛게 익어 가고 있었다. 멱을 감고 다슬기를 잡았다는 개울은 상화로 공사로 묻혀버렸다.
정 위원과 일행은 독립운동을 모의했던 이곳이 안내판은 물론 들어갈 길조차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사진을 찍고 발길을 돌렸으나 향산의 혼이 깃든 곳을 찾아보았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이 책을 통해 향산이 통령으로 추대된 것은 거제 군수를 지낸 전력과 남다른 애국심과 풍부한 재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군수는 상당한 고위직 공무원이다. 을사늑약이 부당하다며 사임하지 않았다면 천석꾼의 재산도 보전할 수 있었고, 일제로부터 우대를 받아 권력을 누리고, 가족을 건사하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안정된 자리였다.
그런데도 독립운동이란 가시밭길을 선택했으니 응당 통령(統領)에 추대될 만하고 또한, 김해에서 태어나고 거제에서 군수를 했으니 연고가 있는 창원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을 생각하니 평소 품고 있었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1919년 체포되어 1920년까지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장석영, 조긍섭을 도와 파리강화회의 제출할 독립청원서 영문 번역과 관계자의 출국 여비로 5,000원(2016년, 기준 2,700만 원 정도)의 거액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잔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환갑이 되던 그해 1942년에 순국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령의 일신, 월배의 덕산학교 설립 이외 월배지역에 보통학교 유치 기성회장으로, 교남학교의 경영이 어렵자 후원회를 조직하여 정상화하는 데 이바지하고, 일인들의 대구체육회를 견제하기 위해 영남체육회장으로 대구종합운동장을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비산동에 건설할 것을 주장했으며, 여운형, 박흥식, 윤치호와 더불어 조선중앙일보사 창립하여 감사를 맡아 언론인으로도 왜관에 향산상회를 열고, 대구의 자본가들이 참여한 대구은행 대주주로, 조선인이 운영하는 조양무진주식회사 이사, 대구상공주식회사 대표 이사 등 경제인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힘들고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 활동했다..
특히, 심산 김창숙(金昌淑)이 쓴 일화 최현달(崔鉉達, 전, 칠곡· 청도군수, 대구 판관역임,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의 아버지)의 행장에 의하면 일화의 집이 경매로 넘어가자 직접 사서 돌려주었다고 한다. 1991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손녀 윤의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 2018』는 그동안 궁금하게 여겼던 향산(香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하였다. 향산 그는 갔지만 손수 심은 배롱나무는 그의 애국심처럼 해마다 붉은 꽃을 피울 것이다.
지난해(2020) 후배인 정진우 앞산공원 소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며 주변을 정비하고 달비골을 찾는 시민들에게 지사(志士)의 유허지 임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하였더니 쾌히 동의하며 진입로를 깨끗하게 정비하고, 산책로 옆과 정자 안에 석재 서병오가 쓴 또 다른 이름 첨운재(瞻雲齋)라고 쓴 안내판을 각각 설치하여 애국지사 향산 윤상태가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첨운재를 쉽게 둘러 볼 수 있게 하였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향산의 공훈록은 다음과 같다.
독립유공자 공훈록
“경북 달성(達城, 현, 달서구, 상인동)) 사람이다.
대한제국 정부에서 군수로 재임 중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1911년 경남 고령(高靈)에서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15년 음력 1월 15일 그는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달성군 안일암(安逸庵 : 현재 大邱市 安逸寺)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를 결성하고 통령(統領)에 선임되어 동단을 이끌었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 경제활동 단체였다.
그는 서상일의 태궁상점(太弓商店), 윤한병(尹翰炳)의 향산상회(香山商會), 안희제(安熙濟)의 백산상회(白山商會)의 경영에도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1917년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가입하여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동단의 변상태(卞相泰)·김관제(金觀濟)로 하여금 경남 일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케 하였다.
1919년 3·1독립 운동의 영향으로 국외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자,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단원들의 군자금 모연(募捐)을 통해 이에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1919년 4월 장석영·김응섭(金應燮)·조긍섭(曺肯燮)이 주관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 영문으로 번역케 하였으며, 김응섭·남형우(南亨祐)가 이를 휴대하고 상해(上海)로 건너갈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채포 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향리인 달성군에서 덕산학교(德山學校)·송석정(松石亭)·회보당(會輔當) 등의 교육기관을 세워 항일민족교육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과 구성원
조선국권회복단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조선의 국권을 회복할 것, 둘째 매년 정월 15일 단군의 위패 앞에서 목적 수행을 기도할 것 셋째 단원은 마음대로 탈퇴하지 말 것 넷째 비밀을 누설하지 말 것 다섯째 만약 이를 위반할 경우는 신명(神明)의 주벌(誅罰)을 받을 것 여섯째, 결사대(決死隊)로 하여금 살육케 할 것을 서약서로 작성한다.
강령 중 단군을 나라의 뿌리로 본 점은 특이하다. 기밀부장 홍주일 등 일부 회원이 천도교 신도들이고 본부의 사무실을 천도교 교구와 함께 사용하는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통령 | 윤상태(달성) | 전, 거제군수 |
외교부장 | 서상일(대구) | 재헌 국회의원 역임 |
교통부장 | 이시영(대구, 초대 법무부장관 이인의 숙부) 박영모(합천) | |
기밀부장 | 홍주일(달성) | 공훈록에는 본적이 대구(남산동) |
문서부장 | 이영국(대구), 서병룡(대구) | |
권유부장 | 김규(마산) | |
유세부장 | 정순영(대구) | |
결사대장 | 황병기(전라도) | |
마산지부장 | 안확, 역원 : 이형재(마산), 김기성(마산) | |
단원 | 우하교(달성), 배상연(성주), 서창규(대구) 편동현(영일), 조필연(상주), 윤창기(대구) 김재열(고령), 장석영(성주), 배상렴(성주) 박상진(울산), 정운일(대구), 신상태(칠곡) 이수묵(칠곡), 김응섭(안동), 조긍섭(달성) 최준(경주), 정용기(대구), 남형우(고령) 서상환(통영), 배중세(마산), 이순상(마산) 서상호(통영), 변상태(진해 또는 창원, 진전면), 황병기(전라도) |
*출처 : 대구독립운동사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2019)
간부 9명과 회원 24명 중 특히, 홍주일은 1916년 명신학교(훗날 기생 출신 육영사업가 김울산 여사가 인수, 복명초등학교 전신)를, 1921년 교남학원(현, 대륜 중고교 전신)을 김영서, 정운기와 함께 설립하고 명신학교 교장직은 자기가 직접 수행하면서 학생들에게 애국 사상을 고취하였고, 외교부장 서상일은 제헌국회에 진출 헌법기초위원을 역임 정부 수립에 이바지했으며. 회원 박상진은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총사령을 맡아 독립군 지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칠곡의 모 부호를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를 받고 많은 사람의 권유에도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고 옥중에서 처형되었으며, 장석영은 이름난 유학자로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협의하여 청원문인 '파리장서'를 초안하고 유림대표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으며,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설립자 경주 최부자 최준도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상인동 출신 유학자 노암(魯菴) 우하교(禹夏敎, 1872~1941)도 참가했다. 노암은 1919년 8월 윤상태가 붙잡혀 예심에서 증인으로 불려 나가 사건을 부인하였다가 같은 해 10월 소위 위증죄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일경에 발각되어 많은 사람이 체포되면서 1919년까지 4여 년 정도 존속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러나 그 후에도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향산가(香山家)와 월배
향산은 본관이 파평이고 다른 이름으로는 윤주경, 또는 윤상우라고도 불렀다. 경남 김해시 명지에서 윤희순(尹羲淳)의 아들로 1882년 태어났다. 아버지 윤희순은 ?-1903년 7월 6일까지 현풍 군수를 역임했다. 1907년 상인동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누나와 자형 우하주(禹夏疇)가 살고 있던 곳이다『대구독립운동사, 2018, 159쪽』아버지 윤 군수는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었다.
유가면 금리 1088번지에는 1902년 빗돌을 세우고, 1904년 비각을 세운 “군수윤희순애민선정비(郡守尹羲淳愛民善政碑)”가 있다. 비문이 마모되어 전문을 해독할 수 없음이 아쉬우나 마지막 구절은 “혜택이 널리 퍼지니 00 더욱 길이 전하리라” 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대구로 온 향산은 월배에 대한 사랑도 남달라 소위 월배육경이란 시를 남겼으니 다음과 같다.
토현신월(兎峴新月), 토끼고개의 초승달
눈썹 같은 달이 산 위로 솟아 하얀 기운 새로워졌다.
한 개의 갈고리 모양 차가운 옥 맑아서 티끌이라고는 없구나.
거문고 가져와 홀로 바라보며 난간 머리에 앉았노라.
청초한 맛에 저절로 그림 속 사람 된 듯하네
*토현 : 달비골에서 수밭으로 넘어가는 고개
배잠낙조(盃岑落照), 배잠에 지는 해
뉘엿뉘엿 지는 해 서쪽 산으로 내려앉으며
한 줄기 밝은 노을 엷은 구름 거두네.
말고 고움 견줘 보니 아침 햇살보다 나은데
푸른 연기가 감싸고 감싸 평평한 숲을 가두네
*배잠 : 화원동산, 일명 배성(盃城)이라고도 함
임암효종(臨庵曉鐘), 임휴사의 새벽종
어렴풋한 숲 끝에 초가 암자가 있어
새벽 되자 희미한 종소리 개울 남쪽까지 들리네
저기 샘물 소리와 어울려 빈 골짝에 메아리치니
은둔자의 게으른 한잠을 흔들어서 깨우네
*임암(臨庵), 임휴사
낙강귀범(洛江歸帆), 낙동강에 돌아오는 배
멀리 떨어진 강가에 저물녘 돌아오는 돛단배
바람 받아 너풀너풀 석양에 돌아오누나
깨끗하고 고요한 절로 강호의 풍광을 실어오기에
술 동이 가지고 달지나 길 기다림이 더욱 좋구나
도원초적(桃源樵笛), 동원동 나무꾼의 피리소리
한 곡조 피리 부는 저녁 산의 나무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 잡되고 소란함이 없구나
옳구나! 여기가 도원에서 멀지 않으니
소타고 비스듬히 피리 부는 이 모두가 신선의 무리일레라.
가야운장(伽倻雲帳), 가야산의 구름 장막
우뚝 솟은 웅장한 소반 햇살 받으며 구름 띄어서
항상 빗기운 품어 어두워지기를 쉽게 하는구나.
비록 그림 솜씨 있어 진짜 형상을 그려 낸대도
맑았다. 흐렸다. 변하는 환상적 모습 그려 내기 어려우리
맺는말
달서구 월배는 대구에서 유일하게 2만 전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어 대구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대구의 뿌리이다. 특히, 출토된 흑요석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가져온 것으로 약 1만 8천 년 전 즉 국조 단군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 구석기인들에 의해 700~800km 떨어진 먼 길을 통해 이동해 온 귀중한 문화재이며, 또한 한 자수성가한 주민 승당(承堂) 조용효(趙鏞孝)는 쇠퇴해가는 효 사상의 전통을 잇기 위해 1956년부터 오늘날까지 해마다 거르지 않고 대구·경북의 효자·효부를 뽑아 표창하는 보화원(補化院)을 설립한 효 문화의 발상지이며, 주민의 애향심도 높아 대구의 구·군 중에서 가장 먼저 지역의 문화와 문화유적, 지명유래와 설화, 성씨와 인물, 민속과 민요를 담은 『월배향토지, 2006』를 발간했다.
뿐만, 아니라, 임란 시 대구지역에서 최초로 창의한 월곡 우배선(禹拜善) 장군이 태어난 곳이자 공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월곡역사공원”은 대구 최초로 부지는 민간 (단양우씨문중)이 기부하고 구와 시가 조성한, 즉 민과 관이 서로 협력하여 명소로 만든 곳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조선국권회복단의 최고 책임자 통령(統領)으로 부와 명예를 다 포기하고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에 헌신하고, 주민들의 교화와 애국 계몽 운동을 펼치기 위해 덕산학교를 설립한 향산을 기리는 사업은 달서구(월배)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될 수 있으며 지역의 가치를 높일 것입니다.
단원 중 서상일의 동상은 조양회관에, 이시영의 기념탑은 앞산공원 큰 골에 이미 서 있다.
쓰레기매립장을 활용해 전국 최초로 대구수목원을 조성할 때 많은 환경·시민단체가 반대했으나 지역주민의 협조로 완성할 수 있었던 점도 구민의 남다른 공동체 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향산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하며 김창숙 등 유림과 가교역할을 했던 노암 우하교도 재조명되었으면 한다.
공교로운 점은 소위 대구정신이라고 하여 많은 시민이 자랑하는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회자 되는 사건이 1960년 2월, 28일 대구 청년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2월 28일(음력, 1월 15일) 결성 되었으니 1960년 2, 2.8민주화운동 45년 전의 같은 날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모임이라면 후자는 독재로부터 국민주권을 되찾기 위해 궐기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목적은 달라도 대구의 자랑이기는 마찬가지다. 올해는 2, 28민주화운동 61주년이 되는 해이고, 조선국권회복단 발기 106년이 되는 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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