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담(蓮潭) 이세인(李世仁, 1452~1576)과 아들 낙서(洛西) 또는 낙서헌(洛西軒) 이항(李沆, 1474~1533 )은 조선전기 구미 출신으로 연산, 중종 조, 각기 권력자 유자광과 김안로와 대결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문신이다. 두 사람은 개령현 대조동(현, 구미시 선산읍 봉남 2리)에서 태어나 아버지 연담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35세, 조금은 늦은 나이인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이때 재상을 선발하는데 이극돈(李克墩)이 유력하자 청도 출신으로 무오사화 때 사사된 헌납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그가 권력을 잡으면 반드시 국사를 그르칠 것이다.”라고 반대했다. 또, 1498년(연산군 4) 사헌부 장령으로 개성부와 한산군의 성(城) 쌓기가 백성들에게 심한 고통임을 상소하여 부역을 덜게 하였으며, 1500년(연산군 6)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柳子光)의 탄핵 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나주 청암역(靑巖驛)으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와 대동도 찰방이 되었다. 이때 대동도 역민(驛民)들이 공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웠다.
이어 사간원 사간을 거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김산(金山)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뀐 뒤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직제학으로 승진했다.
유자광에 대한 탄핵 소를 또 올려 결국 유배시켰다. 형조참의, 사간원 대사간,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다시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고, 승정원 좌승지를 거쳐, 외직으로 황해도 관찰사, 내직으로 돌아와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516년(중종 11) 관찰사 재임 중 과로로 얻은 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별세하니 향년 64세였다. 1524년(중종 19) 홍문관·예문관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연담집』이 있다.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신도비에 “경술에 근본 하여 몸과 마음을 바르게 닦았고, 기품에는 잡됨이 없고 몸은 병을 몰랐다. 장수하리라 믿었으며 정승과 판서의 물망에 올랐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훗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20여 년간 세 왕을 보필하고 주로 삼사(三司)에서 벼슬을 하면서 바른말과 정의로운 일에는 앞장섰고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전하며 『명신록(名臣錄)』에 등재되었다.
연담은 뿌리에 대한 자긍심도 남달라 1489년(성종 20) 세보(世譜) 명(銘)에 “아득한 우리 선조여! 저 신라 고려로부터 시작되었네. 사공(司空) 이능일(李能一)이 시조로 성산이씨의 뿌리가 되었네. 가지가 번성하고 향기가 멀리 퍼졌으니 빛나지 않을쏜가? 대대로 성하였네. 아름답도다. 정언공(正言公) 이여량(李汝良)이여. 충직에 더욱 힘써서 내직에서는 법의 기강을 유지하였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지방을 잘 지켰으나 지위는 덕에 못 미쳤고 어두운 시대를 만났다네 현감공 이시(李時)는 그 덕을 잘 본받았고, 사직공 이효순(李孝純)은 선조의 업을 잘 계승하였으나 아름다운 덕을 속에 감추고 빛내지 못하여 선대의 공렬(功烈)이 중간에 침체하였네.
영명하신 우리 선고(先考) 이벽(李璧)은 겸손하고 공손하여 화락하셨으며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셔서 재능과 학문이 정밀하고도 조예가 있었다네. 아 나는 견문이 적고 고루하여 우러러 바라보아도 미치지 못하건만 선조가 남긴 경사에 힘입어 외람되게도 과거에 급제하였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았지만 갚으려 해도 방도가 없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나태해질 수 있겠는가. 내 명(銘)을 지어 맹세한다.”라고 했다.
이글을 보면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세보가 성종 대에 한 번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와 부(賦)에도 뛰어나 문집에 다수 수록되어 있으며 황주(黃州) 극성전, 안악군(安岳郡) 객관에도 시판이 걸려 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도 등재되어있다.
아들 낙서(洛西)는 24세인 1498년(연산군 4)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시작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동부승지, 사헌부 대사헌, 경상좌도 관찰사, 형조, 예조, 이조, 병조 4조(曹)의 판서를 역임했다. 성산이씨로서는 전무후무하게 재상 우의정에 올랐으며 1531년(중종 26) 김안로에 의해 중종의 서자 복성군(福城君)을 세자로 옹립하려 했다는 무고로 함경도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1533년(중종 28)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훗날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의 조작 사실이 밝혀져, 신원 되었으나 이미 유명을 달리한 뒤여서 아쉬움이 크다. 이 날조 사건을 주도한 김안로는 낙서 이항뿐만 아니라, 심정, 김극핍을 소위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즉 김안로가 세 사람에게 억지로 붙인 이름이다. 묘지명은 영의정 이 썼다.
이즈음 집안이 몰락하면서 시문이나 저술한 많은 서책이 흩어졌다. 겨우 수습한 것이 『낙서유고』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대사헌으로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고 시강원에서는 재상과 대간의 반목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가 죽게 되었다고 간언하기도 하였다.
김극성(金克成), 남곤(南袞), 문경동(文敬仝), 박상(朴祥), 박은(朴誾), 심정(沈貞) 이현보(李賢輔), 조신(曺伸) 등과 교유하며 시주(詩酒)를 즐겼다. 대사헌으로 조광조가 야심 차게 추진한 현량과가 공정성이 부족한 점을 우려하는 다른 훈구파를 대신하여 대사간 이빈(李蘋)과 함께 폐지할 것을 주청(奏請)하여 성사시켰다.
문명(文名)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1521년(중종 16) 명나라가 세종의 등극을 알리려고 온 사신들의 접빈객으로 선발되어 이행, 정사룡, 소제양, 남곤 등과 명(明)의 사신들 간에 서로 주고받은 시를 정리해 놓은 『황화집(皇華集)』에 수록되어 중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 외 몇 가지 남긴 기문 중 “김생필적기(金生筆跡記)”는 영천(현, 영주시) 군수로 재직하던 1509년 (중종 4) 인근 봉화현 폐사지에서 “태자사낭공대사탑비”를 찾아낸 경위를 적은 글이다. 이 빗돌은 중국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와 필적할만한 신라 김생의 글씨가 집자(集字) 되어 있어 서예가나 금석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귀중한 사료가 되어 훗날 문화재(보물 제1877호)로 지정된 것을 수습하게 된 경위를 밝힌 글이다. 이후 이 빗돌은 1818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용산 국립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낙서가 수습하여 보물로 지정된 태자사낭공대사탑비
낙서가 더 특별한 것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 부자(父子)와 형제, 임금과 신하, 부부간의 지켜야 할 윤리가 무너지고 있는 데 반해 음담패설 등을 소재로 한 서적이 널리 읽혀 도의가 무너지는 현실을 보면서 난해한 『오륜전비기』를 알기 쉬운 언문(諺文)으로 다듬고 고쳐 『오륜전전(五倫全傳)』을 펴내 교화에 앞장섰다.
충주 현감 서애 류성룡의 아버지 유중영(1515~1573)은 이 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중간(重刊)을 도모 주민교화에 활용한 점에서 낙서는 조정에서 국사에도 책임을 다했지만, 도덕이 충만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처음 만든 언문 본은 현재 찾을 수 없고 의성김씨 종가에 누군가 다시 한문으로 번역한 책이 남아있어 국역하기에 이르렀다.
낙서는 퇴계를 대 유학자로 성장시킨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와는 승문원에서 함께 관리를 시작했다. 이후 20여 년간 우의를 쌓아 이것이 인연이 되어 송재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묘지명을 쓴 것이 『송재집』에 실려 있다.
두 분의 문집 『연담집 부 낙서유고』 국역은 종손이 아닌 방계 후손 경북대학교 이구의 교수와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연구원 이승용 박사의 주선으로 완성했다. 이를 두고 경북대학교 권태을 명예교수는 “이루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란 더욱 어렵다는 선현의 말씀은 『연담집 및 낙서유고』를 지켜온 선생의 후손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말로 여겨질 것이다. 선생 사후 근 5백 년 만에 국역본을 기획한 이구의(李九義) 박사와 함께 번역한 승용(承容) 박사(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연구원) 숙질간의 현로(賢勞)는 지금까지 가려졌던 연담선생 부자분의 진면목이 훤히 밝혀지면 절로 보상되리라 믿는다.
남의 손을 거치지 않고 후손들에 의해 유문을 증보하여 국역 『연담 부 낙서유고』가 발간되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널리 읽혀 한국 인물사나 문학사에 두 선생이 크게 천양 되기를 충심으로 빈다.”라고 했다. 혹자는 선조 현창(顯彰)을 위해 많은 돈을 들여 빗돌을 세우고, 재사를 짓는 것보다 문집을 읽게 하고 책을 만들어 국공립 도서관에 배부하면 언제가 마모되는 비석이나 세월이 흐를수록 퇴락하여 무너지는 사묘(祠廟)와 달리 영구히 보존된다고 한다. 새겨들을 말이라고 생각된다. 피붙이는 물론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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