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서문시장 이전 100년

이정웅 2023. 2. 7. 07:05

 

 

 

올해(2023)는 동산동 일대에 있던 큰 장이 대신동으로 옮겨 온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920. 비산동 일대의 고분을 발굴하면서 나온 흙으로 천황당못(天皇堂, 천왕당(天王堂)못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으나 대구시의 공식 자료에 천황당못이라고 하여 그대로 인용했다)를 메우기 시작하여 1923331일 축하연을 열고 41일 개장하였다고 한다.

2023년은 동산동일대에 있던 서문시장이 대신동으로 옴겨온 100년이 되는 해다.

조선 시대, 충청도 강경, 평안도 평양과 더불어 우리니라 3대 시장의 한 곳이자 다양한 생필품을 값싸게 공급하여 시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대구의 주종산업인 섬유산업 발달에도 크게 이바지한 시장의 기능 이외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가 열렸고,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3.1만세운동이 전개되는 등 애국 운동의 산실이기도 했고 특히, 보수 심장으로 불리며 최근까지도 유력 정치인들이 자주 찾아오는 한국 정치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런 대구시민의 자존심을 대구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가운데 대구교육박물관은 주제를 대구 큰 장, 서문시장”, 부제를 장터에 담긴 100 역사라는 슬로건으로 기획전을 열고, DGB대구은행의 사외보 계간 향토와 문화2022년 가을호 전면에 서문시장 이전 100이라는 제호로 자세히 소개했다. 이 전시회와 특집을 통해 대구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고 시민들의 애환이 깃든 서문시장을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향토와 문화와 대구교육박물관의 전시자료에 놓친 부분이 있어 이야기를 덧붙여 보기로 한다.

 

천황당못 = 남소(南沼)

 

조선 초기 대구가 배출한 걸출한 문신(文臣)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재임 중 세종으로부터 시작해 성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섯 임금을 모시며 23년간 양관(兩館) 대제학을 역임했다. 고향 사랑에도 남달라 장원급제한 도하(都夏, 1418~1479)와 대봉(大峰) 양희지(楊熙止,1439~1504)에게 대구에 내려가거든 후배들을 잘 길러 조정에 진출하도록 하는 일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을 뿐 아니라. 대구의 아름다운 10곳을 소위 대구 십영(十詠)이라 하여 시를 남겼으니 제1 , 금호범주(琴湖泛舟), 2 영 입암조어(笠巖釣魚), 3 영 구잠춘운(龜岑春雲), 4 영 학루명월(鶴樓明月), 5 영 남소하화(南沼荷花), 6 영 북벽향림(北壁香林), 7 , 동사심승(桐寺尋僧), 8 영 노원송객(櫓院送客) 9 영 공령적설(公嶺積雪), 10 영 침산만조(砧山晩照) 이다.

이 십영을 향토문화자산으로 높게 평가한 대구시는 제1 영은 금호강, 3 영은 연구산, 4 영은 금학루, 6 영은 도동 측백나무숲, 7 영은 동화사, 8 영은 대노원, 9 영은 팔공산, 10 영은 침산으로 확정하고 표지석을 설치했다.

 

해동지도에 남소가 대구읍성 달서문에서 서쪽에 그려져있다.
1918년 대구 지도 천왕당 못과 남소의 위치가 비슷하다,

그러나 제2 영 입암조어(삿갓 바위에서 고기 낚기)의 입암(笠巖)을 실제는 북구 옥산초등학교 부근인데 건들바위로 잘못 비정(比定)하였고, 5 영의 남소하화(南沼荷花, 남소의 연꽃)의 남소는 천황당못인 데도 성당못 또는 영선못(, 영선시장 일대에 있었던 못) 이라고 하는 등 확정하지 못했다.

천황당못이 남소인 이유는 첫째 사가(四佳)가 십영을 쓸 당시 대구도호부의 관아(官衙)는 달성(, 달성공원)에 있었다. 그곳에서 보면 천황당못은 남쪽이기 때문에 남소(南沼)라고 했다.

둘째, 15세기 대구의 못 현황을 알 수 있는 사료로 경상도속찬지리지 1469가 있다. 제언(堤堰) 편에 부의 남쪽 감물천리에 성당제(聖堂堤), 남산리에 연화제(蓮花堤), 화산리에 감물삼제(甘勿三堤), 사리동리제(沙里洞里堤) 4개소의 못이 있었으나 남소는 없다. 그 까닭은 못 이름()에서 알 수 있다. 기계와 장비가 부족했던 그때 못 만드는 작업은 사람 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하천이나 골짜기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못 이름에 둑 제()를 붙였다. 반면에 남소는 저지대에 자연적으로 물이 고인 늪 즉 소()였기에 제언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셋째 조선 후기 <해동지도>에 남소가 천황당못과 같은 위치에 그려져 있다. 그 후 언젠가 이름이 천황당못으로 바뀌고 1923년 즉 100년 전 마침내 서문시장으로 변신했다. 사가의 시 남소하화를 보면 당시 천황당못에는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였다.

 

갓 돋아 난 연꽃은 엽전 포갠 듯하지만, 出水新荷疊小錢

활짝 피면 크기가 배만큼이나 크네 花開畢竟大如船

너무 커서 쓰이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莫言才大難爲用

만백성 고질병을 낫게 하리라 要遺沈痼 萬性痊

 

사가(四佳)는 군자를 상징하는 연꽃을 동전 즉 화폐와 만백성의 고질병을 치료하는 약용식물로 비유했다. 늪지대 남소가 장차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서문시장)과 질병을 치료하는 대구 최초의 근대식 병원(동산병원)이 들어설 것을 예상한 듯했다.

 

천황당못 소유자 서예가 박기돈

 

시장 이전은 시설현대화나 거래 활성화가 주목적이 아니었다. 비사(祕史)가 박영규(朴英圭)대구설화(大邱說話)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 경찰 출신 대구부의 부윤(府尹) 마쯔이(松井信助)는 시장 이전 대상 부지로 천황당못을 점찍어 두었다.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대구 만세운동과 같은 소요사태가 발생해도 동산이 가로막아 진압에 유리하며, 토지 소유자가 비록 국권 회복 등 조선인의 생활향상에 노력하고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비교적 온건한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 1873~1948)이어서 협상에 유리하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박기돈 고택

회산은 본관이 밀양으로 서울에서 박문환(朴文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합천 야로에 방대한 전답을 가지고 있어 그곳으로 이주하여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1850~1928)에게 한학을 배웠다.

 

1903년 대한상공학교 교관으로 처음 공직에 발을 들어 놓고 훗날 정3품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가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기다리던 중 악천후가 계속되면서 여객선이 뜰 수 없자 포기하고 대구에 정착했다.

해인사 장경판전 현판

국채보상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1907년 대구상무소(대구상공희의소 전신) 소장을 맡아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망할 수 없다야시장개설 등 조선인의 상권 보호에 앞장섰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아 통곡으로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1920년 늦가을 어느 날 마쯔이는 박기돈을 초청하여 시장 근대화라는 그럴듯한 말로 승낙받았다. 천황당못과 일대 전답 1만여 평을 평당 30(당시 쌀 한 되가 45, 4,800원 정도) 즉 쌀 한 되 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매입했다.

마쯔이는 이곳에 대지 45백 평, 연건평 496평의 건물을 짓고 나머지 땅은 되팔아 큰 이익을 챙겼다. 이후 회산은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서예에 몰두해 일가를 이루었다.

1923년 대구 최초의 전시회인 대구미술전람회(교남YMCA)”에서 이상정, 이쾌대의 동생 이여성, 석재 서병오, 이상화의 형 이상정과 함께 참여했다. 당시 석재는 회장 회산은 부회장이었다. 그의 작품은 현재 해인사, 통도사, 운문사, 쌍계사, 파계사 등에 남아 있다. 특히, 국보(52)이자 세계문화유산인 해인사장경판전 현판이 눈길을 끈다.

2018대구문화재단이 기획한 대구근현대문화예술인물로 시인 이장희, 영화감독 이규환, 작곡가 하대응과 더불에 서예가에서 그가 선정되었다.

 

대구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서문시장 이전은 명분과 달리 그 이면에는 일제의 음흉한 간계가 숨어 있었다.

매립 전 천황당못은 시민들의 휴식처였다. 대구의 한량들은 물론 젊은 남녀의 데이트 장소였다. 그 와중에 한 처녀가 남자에게 버림받자 투신자살했다. 그 원혼이 해코지로 불이 자주 난다는 소문이 돌면서 상인들이 십시일반 갹출하여 굿을 해서 1960년대까지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현재 서문시장은 6개 지구 4,000여 개의 점포, 2만 명의 상인. 하루 평균 4~5만 명이 찾는 대구 최대의 시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