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사진(게산성당)
영남이공대학교는 대구의 여느 대학교와 달리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대학이다. 자료상 첫 인연을 맺은 분은 육영수 여사다, 그냥 지나치면 모를 작은 녹지에 1972년 4월 12일 육 여사가 심은 전나무가 있고, 학교의 정문 앞에는 1975년 6월 26일에 건립한 박 대통령의 친필 “기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휘호 조형 탑이 있어 그렇게 생각된다. 이런 사실만으로 영남이공대학교는 박 대통령 내외분이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학 홈페이지의 연혁(沿革)에는 이런 내용이 소개되지 않았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기술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박 대통령 내외분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쯤으로 짐작은 되지만 구체적인 기술(記述)이 없어 아쉽다. 국정에 바쁜 대통령 내외분이 구성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글을 써주고, 영부인이 직접 방문해 나무를 심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어느 곳에 나무를 심는 일은 그냥 왔다 갔다는 증표를 남기는 일이 아니다. 오래 살고 거친 비바람에도 꿋꿋이 버텨내는 나무처럼 공동체 모두가 무럭무럭 성장하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영남이공대힉교 역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역대 영부인 중 가장 존경받는다는 육 여사는 충북 옥천 출신이다. 전쟁 중인 1950년도 12월 12일 계산성당에서 한 쌍의 신랑 신부가 허억(許億) 초대 대구시장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니 신랑은 훗날 조국 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신부는 영부인이 된 육영수 여사였다. 전쟁 중이라 미처 주례를 찾아보지 못해 이름만 알고 있던 허 시장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고 불러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당시 신랑은 34세 육군 중령으로 9사단 참모장이었고, 신부는 26세 아리따운 처녀였다.
삼덕동 1가 5-2번지,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여 2년 후 1952년 박근혜 대통령이 태어났다. 두 분이 처음 만난 곳은 피난지 부산으로 영도다리 옆 한 음식점이었다고 한다. 신부의 이종 6촌 오빠이자 신랑의 대구사범학교의 1년 후배인 송재천 씨가 중매였다고 한다.
육 여사는 아버지 육종관(陸鍾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에서 1925년 태어났다. 옥천의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부산 피난 중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만나 그해 계산성당에서 혼인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 16 군사혁명을 성공한 뒤 1963년 5대 대통령에 당선 돤 후 11년간 내조하였다.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으며 어린이회관과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기술직업훈련원 설립, 정신박약아(精神薄弱兒) 돕기 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를 건립하였다. 전국에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과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까지 일일이 순방하면서 온정을 베풀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저격당하여 서거하시니 향년 49세였다.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오전 10시 각국 조문 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1974년 11월 21일에 제막되었으며, 이듬해 기념사업회가 발족 되어 추모 책자를 펴냈다. (출처 : 박정희 대통령기념사업회, 일부 첨삭)”
육 여사가 재임 중 방문하였던 소록도에서의 18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두고두고 회자 되고 있다. 전남도에서 문재인 후보가 89.28%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있는 데 비해 박근혜 후보가 10%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러나 고흥군 도양읍 제7 투표소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62.65%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36. 66%에 머문 문재인 후보를 26% 앞질러 승리한 단 한 곳이다. 육 여사가 돌아가신 지 28년이 지났지만, 존경심을 잊지 않은 주민들이 딸 박근혜에게 은혜를 보답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무가 있는 소공원은 몇 년 전에 왔을 때보다 잘 정비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사이 주변의 다른 나무들에 너무 커서 육 여사가 심은 나무는 성장이 멈추다시피 하고, 잘한다고 그랬겠지만. 생장점을 잘라 본래 모습을 잃고 있었다. 그늘지게 하는 이웃의 나무는 딴 곳으로 옮기고 내력도 간단히 적어 재학생은 물론 방문객들도 볼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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