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연사 부처님 사리(舍利) 봉안 내력
고찰 용연사는 912년(신덕왕 1)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후 운문사를 반석에 올려놓은 보양국사(寶壤國師)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이다. 특히, 대구 근교로 접근하기 쉽고 주변의 숲이 잘 보전되었다. 따라서 봄의 신록이나 여름의 무성한 숲, 가을의 울긋불긋한 단풍 등 언제 찾아도 아름답다.
또한, 동화사의 많은 말사(末寺) 중의 한 절이기는 하나 여느 말사보다 특이한 점은 전래가 확실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석조계단(石造戒壇, 보물)이 있다.
대중을 생로병사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어느 전국의 어느 절인들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 절이 없지만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절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귀하고, 그만큼 사격(寺格)이 높다 하겠다. 비록 불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2,500여 년 전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안락하게 누릴 수 있는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행을 통해 진리를 얻고자 한 그의 숭고한 인류애는 최고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이 어떻게 용연사로 오시게 된 내력을 두고 절에서는 물론 대구시, 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관련기관마다 달리 설명하여 성보(聖寶)에 대한 결례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바로잡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한 사료는 1676년(숙종 2) 사헌부 지평 권해(權瑎)가 짓고 완산인 전렴(全濂)이 전서(篆書)와 비문을 쓴 석조계단 남쪽에 있는 석가여래비(釋迦如來碑)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A, 용연사가 안내판에 써 놓은 적멸보궁 안내문
“====보궁의 유래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께서 중국 오대산에 기도하신 가피력(加被力)으로 금란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돌아와서 설악산 봉정암, 영축산 통도사, 태백산의 정암사, 오대산의 월정사, (영월) 사자산의 법흥사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여 이를 오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강원도 건봉사, 선산의 도리사와 더불어 이곳 용연사의 적멸보궁을 우리나라의 8대 보궁 중 한 곳으로 영남지방의 영험한 기도 도량으로 부처님의 훈향을 느낄 수 있는 성지다. 용연사의 보궁은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 스님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통도사에서 금강산으로 모셔 가던 중 사리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여 그 역사적 가치가 더 큰 것이다.”
B, 대구시가 관광객에게 나눠주는 리플렛
용연사 금강계단은 임진왜란(1592년) 때 난을 피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통도사에서 다시 금강산으로 모시고 갈 예정이었으나 승군들의 주둔지로 비슬산 용연사가 안점함을 판단하여 용연사에 봉안하였다. 전란이 위급할 경우 금강산으로 옮길 예정이었으나 전란이 평정되어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 스님이 부처님 사리 2과 중 1과는 본래 봉안처인 통도사로 돌려보내고 1과는 용연사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c, 문화재청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 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 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
d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용연사 금강계단에 봉안된 석가모니사리는 신라 선덕 여왕(善德女王)[632~647] 때의 고승인 자장 법사가 중국에서 구법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와 두 개의 함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되어 사리를 도난당하였다. 그 후 사명 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나머지 한 함은 통도사에 안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 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일시 봉안하였으나 1673년(현종 14) 5월 5일 이곳 용연사에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을 건조하고 봉안하게 되었다.
석가여래비(釋迦如來碑, (출처, 대구읍지, 1899)
옛날 석가의 사리가 거의 8곡(斛) 4두(斗)나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승려 자장
(慈藏)이 서쪽으로 천축국(인도)에 가서 몇 개를 가지고 와서 양주(梁州, 경남, 양산시)의 통도사에 보관하였는데, 두 상자에 각각 두 개씩 넣었다. 만력(萬曆) 임진년(1592)의 난리에 왜적이 탑을 허물고 사리를 꺼내자 송운대사(松雲大師) 유정(惟政, 1544~1610)이 격문을 돌려 승군을 일으키고 재앙을 내린다는 말로 겁을 주니, 왜적이 두려워서 모두 돌려보냈다.
송운대사가 사리를 받들고 금강산에 이르러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에게 물었다. 휴정이 탄식하며 “자장은 신인이다. 그가 처음 보관할 때에 깊숙이 숨겼으나 마침내 드러남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나에게 갈무리하도록 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에게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 하였다.
드디어 한 상자를 제자인 선화(禪和) 등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에 봉안하게 하고, 또 한 상자를 송운대사에게 주어 통도사로 돌려보내어 탑을 고쳐 봉안하게 하였으니, 근본을 잊지 않도록 한 것이다.
당시에 영남은 새로 전란을 겪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새와 쥐처럼 달아나 탑을 고칠 겨를이 없었다. (정유재란을 말하는 것 같음) 송운대사도 또한 일본에 어명을 받들어 갈 일이 있어 (1604년, 선조 37)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교토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조선인 3, 500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온 일) 상자를 받들어 원불(願佛, 가호를 내리는 부처)로 삼았고 그 상자를 바꾸어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머물러 두었다.
승도(僧徒) 청진(淸振)이 비슬산 용연사(龍淵寺)로 옮겨 봉안하였고, 뒤에 대중들이 서로 의논하여 탑에 보관하였다. 또 두 사찰에 봉안하라는 휴정대사의 뜻을 어길까 두려워하여 한 개는 통도사에 봉안하고, 또 한 개는 용연사의 북쪽 기슭에 봉안하였다. 계축년(1673, 현종 14) 5월 5일에 탑이 완성되었으니, 높이가 5척 5촌이었다.
이 절의 승려인 광헌(廣憲)·광륜(廣倫) 등이 북쪽으로 7백여 리를 달려와 서울에 있는 나를 방문하고 그 일의 전말을 알리며 명(銘)을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젊어서 공자의 글을 읽었고 불가의 말은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 불가의 사적을 알겠는가? 그러나 석가가 죽은 뒤 1600여 년 뒤에 그의 사리가 중국 땅 5만여 리를 거쳐 우리나라의 통도사에 봉안되었고, 또 940여 년 뒤에 왜적이 꺼내었다가 되돌려 주었고, 또 80년 뒤에 통도사의 옛 탑과 비슬산의 용연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하니, 이 말을 믿는다면 또한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들의 말에 따라 사적을 차례로 서술하고 명(銘)을 붙인다.
비슬산 울창하고
낙동강 출렁이는 곳
우뚝한 탑 있으니
석가의 사리 간직된 곳이로다
지평(持平) 권해(權瑎)가 짓고, 전렴(全濂)이 비문과 전서(篆書)를 쓰다
*( ) 필자가 참고로 써넣은 글
*전서와 비문을 쓴 사람을 김렴(金濂)으로 오역한 자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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