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곡(中谷) 문태갑(文胎甲) 선생과 인흥마을 홍매화(紅梅花)
녹지공무원으로 시가지에 나무를 심고, 공원과 수목원을 조성하면서 개인적인 소망 하나는 조경식물을 통해 24절기 중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과 비슷한 시기에 꽃이 피는 나무를 심고 싶었다. 절기는 입춘(立春)이지만 주변은 겨울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데 방송사나 신문은 양지쪽 계곡물이 흐르는 장면이나 버들강아지의 움튼 가지, 눈 속에 핀 복수초 등을 영상으로 내보내며 봄이 왔음(?)을 알리기 때문이다.
어느 이른 봄, 전남 구례군에 있는 대한종묘원(원장 장형태)을 방문했다. 그때 농장을 둘러보다가 진한 향기기가 코를 자극해 살펴보니 붉게 핀 홍매 한 그루가 흰 눈으로 덮인 지리산 정상과 묘한 대조를 이루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다!. 시민들에게 봄소식을 빨리 전해 주려고 찾던 나무가 바로 이 홍매로구나 생각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평소 알고 지내든 매화전문가 정옥임 여사에게 삽수(揷穗)를 구해 묘목을 생산해 놓으면 사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정 여사는 그 일을 진행했다. 이후 생산된 묘목을 사서 시민들이 많이 찾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경상감영공원에 심고 일부는 인흥마을에 심었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꽃이 피면 완상하려는 시민들로 붐비고 이를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하며 특히, 인흥마을은 마을 사람들이 성가실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되었다.
인흥마을은 대구를 대표하는 민속 마을로 대구에서 몇 군데 남아있지 않은 비보(裨補) 숲(천연보호림)과 희귀 수종인 노란해당화, 지금은 고사(枯死)해 베어버린 조각자(皁角子)나무(보호수)도 있었고, 특히, 문희목 댁의 능소화 고목은 지금도 꽃이 필 때 전국의 각지에서 사진작가들이 찾아온다.
나무 살펴보는 일로 드나들다가 만난 분이 중곡(中谷) 문태갑(文胎甲) 선생이다. 평소 매화를 좋아해 이미 조성해 놓은 백매원(白梅園)이 있는데 그 주변에 홍매를 더 심어 줄 것을 제안했고 그때 심은 것이 크게 자라 최근 유명세(有名稅)를 타고 있는 소위 인흥매(仁興梅)다.
중곡은 독립운동가 문영박(文永樸) 선생의 손자로 1930년 인흥마을에서 태어나 수창초등학교와 명문 경북중, 고등학교를 거처 서울대학교 상대(商大)를 졸업했다.
동양통신 정치부장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해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잠시 신현확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그 후 다시 언론계로 복귀하여 서울신문 사장과 한국신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을 마지막으로 귀향한 문희갑 전 시장의 사촌 형이기도 하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우리에게 참된 전통의 계승이 무엇인가를 침묵의 소리로 말해 주는 소문 나지 않은 명소가 있다. 그곳은 대구광역시 화원 인흥마을에 있는 남평문씨 세거지다”라고 평가할 만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명문의 집성촌이다.
누군가 중곡에게 왜 낙향했느냐고 물으니 “도시는 일하는 곳이다. 일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낙향이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할 일을 다하고 돌아오는 귀향이나 환향(還鄕)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조그마한 응접실인 거경서사(居敬書舍)에 머물면서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문고(文庫) 즉 도서관으로 국내 최대인 1,095종, 6,948책(도산서원, 4,400책, 1975년)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인수문고(仁壽文庫)와 당신이 소장하고 있던 5,000여 한국학 관련 책이 있는 중곡문고(中谷文庫)를 관리하고, 문중소유 토지를 시에 기증하여 연못으로 조성한 인흥원(仁興園) 개원을 주도한 이외 “마을의 형성 과정”과, “가계와 세덕” 등을 정리한 마을지 『인흥록(仁興錄), 2003, 규장각, 필명 문희응 (文熙膺)』을 편찬했다.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론계, 관계(官界), 정계의 요직을 맡아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비화 등이 많을 것이나, 자서전 한 권 남기지 아니하여 아쉽다. 명함에도 화려한(?) 전력(前歷)을 쓰기보다는 단지 이름 석자만 쓸 만큼 드러내기를 싫어했으며 평범한 촌로의 모습으로 집안 대소사를 챙기며 찾아오는 지인을 만나며 소일하다가 2024년 향년 94세로 영면했다.
온화한 성품에 찾는 사람을 늘 편하게 맞아주었다. 마을 뒷산에 가족 묘원(墓園)의 한 그루 은행나무 밑에 조용히 잠들었다. 해마다 봄이면 당신이 가꾼 홍매는 붉게 필 것이고, 탐매(探梅) 하려는 사람들로 인흥마을은 한동안 소란스러울 것이다. 그 모습을 지하에서 반기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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