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부 공묘(孔廟) 안에 있는 행단(杏壇)
행단 앞 쪽에 심어져 있는 살구나무
행단이라고 쓰인 현판
화가 나능호가 모사한 공자행단현가도(孔子杏壇絃歌圖,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40호)주변의 나무가 살구나무다, 원본을 보면 붉은 살구꽃이 가지마다 만개했다.
대사성 운탁이 성균관 명륜당 앞에 심은 은행나무(사진 : 문화재청)
공자(BC551~479)가 고향 곡부의 나무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나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살구나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은행나무라고 하여 오늘날까지도 시비가 가려지지 아니하고 있다. 그 까닭은 행(杏)자를 자전에서조차도 ‘살구나무’라고도 하고 ‘은행나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은행나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맹사성의 맹씨행단(사적 제109호)이 그렇고 대사성 윤탁(1472~1534)이 1519년(중종 14) 성균관 명륜당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문행(文杏)이라 불렀던 것도 그렇다. 조선은 건국이념이 유교였던 만큼 유학(儒學)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건국 초부터 각 고을에 향교(鄕校)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향교 관리에 책임이 있는 수령들은 향교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오래 사는 나무인데다, 수관(樹冠)이 크고, 단풍이 아름다우며, 병충해(病蟲害)의 피해가 덜하고, 잎에서 추출된 물질은 혈액순환개선제로 쓰이는 등 약성도 높아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제사(祭祀) 지내고,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에 어울리는 나무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은행나무가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조선 전기 강희맹(1424~1483)으로부터 이수광(1563~1628)과 조선 후기 정약용(1762~1836)에 이르기까지 문제를 제기했던 것 같다. 특히, 다산은 <아언각비>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잘 못 알아 공자의 사당 뒤에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을 상징하게 되었다.’ 고 하여 은행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필자 역시 ‘행단=은행나무가 있는 곳’ 이라는 설에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 일본인 나까무라 고이치(中村公一)의 <꽃의 중국문화사, 번역 조성진·조영렬>를 보았더니 ‘살구나무’였다. 더 나아가 중국에서는 살구나무 꽃을 급제화(及第花)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알았다.
살구꽃이 급제를 상징하는 꽃으로 불러지게 된 것은 당나라의 과거제도와 관련이 있었다. 합격자 명단을 음력 2월에 발표하고 이때 수도 장안은 살구꽃이 피는 때이자 합격자들을 위한 대규모의 연회(宴會)가 도성 제일의 명승지인 곡강지(曲江池)에서 벌어지고 이어 2차 연회는 곡강을 건너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핀 행원(杏園)에서 펼쳐졌다고 한다.
따라서 이 연회를 일러 곡강연(曲江宴) 또는 행연(杏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황제(皇帝)가 직접 참석하여 급제자들의 노고와 합격의 기쁨을 축하하였다고 한다. 흥겨운 음악과 맛 좋은 술로 연회가 깊어질 때면 장안은 전도유망한 청년을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 또는 화려한 연회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도시가 텅 빌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중국 사람들에게 살구꽃은 ‘과거합격’이나, ‘학업성취’를 상징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묘의 행단(杏壇)은 공자 생존 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산동성 곡부현에 있는 공자의 구택(舊宅)을 방문하여 그 기념으로 교수당(敎授堂) 남은 터에 전(殿)을 세웠는데, 훗날 송나라 건흥(乾興) 연간(1022년 =필자)에 대전(大殿)을 뒤로 옮기고 그 자리에 기와를 쌓아올려 단을 만들고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은 것으로 비롯되었으며 그 후 금(金)나라 학사 당회영(堂懷英)이 그 곳을 찾아 행단(杏壇)이라는 비(碑)를 세운 것이라고 한다.
2015년 봄 칠곡향교의 유림들과 더불어 곡부를 찾았다. 평소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행단의 나무가 살구나무인지 은행나무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자하는 욕심이 더 강했다.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공묘(孔廟)는 규모도 크거니와 자국 내의 관광객은 물론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 장날같이 붐볐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랴 일행을 놓지 지 않으랴 정신없었다. 다행이 휴식시간이 주어져 그 시간을 이용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 오래된 나무는 아니지만 주변에 살구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 한 기쁨은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귀국 후 다른 일로 원고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어느 날 KBS의 진품명품에 공자의 생전 일화 중 ‘행단예악(杏壇禮樂)’을 내용으로 한 그림 <공자행단현가도(孔子杏壇絃歌圖,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40호)>가 출품된 것을 보았다.
강릉 출신으로 삼척부사를 지낸 함헌(咸軒, 1508~?)이 1552년(명종 7)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 수도 북경에 갔다가 곡부현 궐리에 들려 공자의 후손 공대춘(孔大春)으로부터 얻어온 것을 1887년(고종 24) 전주 지역의 화가 나능호가 이모(移模)한 것으로 감정가 5,000만원이었다. 이 그림에도 살구꽃이 만개해 있어 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보강하게 되었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친상간의 단초를 제공한 나무 (0) | 2006.07.20 |
---|---|
세한도 (0) | 2006.07.20 |
보호 대책이 시급한 주산지의 왕버들 (0) | 2006.07.20 |
해당화 (0) | 2006.07.20 |
풀과벌레를 즐겨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와 이이 (0) | 200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