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풀과벌레를 즐겨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와 이이

이정웅 2006. 7. 20. 22:01
 

 오죽헌

 신사임당상 (강릉 경포대)

 

 초충도

 

풀과 벌레를 즐겨 그린

사임당과 기호학파의 종조 이이


오래 동안 서울에서만 살던 손아래 동서가 이제 현업에서 물러나 동해안의 아름다운 어항(漁港) 주문진에 보금자리를 틀고 한번 놀러오라는 전갈을 받고 먼 길을 나섰다. 약봉(藥峰) 서성(徐渻)의 어머니 고성 이씨와 갈암 이현일의 어머니 인동 장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현모 즉 어진 어머니로 존경받는 신사임당과 경세가이자 기호학파의 조종(祖宗)인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강릉시외 버스 터미널에 마중 나온 동서(同壻)의 차를 타고 오죽헌을 향했으나 이정표가 엉망이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관광도시를 지향하는 강릉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인 오죽헌을 외지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 놓아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너무 소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오죽헌은 예술가인 어머니 신사임당과 대학자인 율곡이 태어나고 자란 성역답게 아름답고 품위 있게 조성해 놓아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문성사를 중심으로 오른 쪽은 배롱나무가, 왼쪽은 매화나무가 6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 나온 나무답게 고풍스러웠다. 그러나 배롱나무는 아직 개화 전이고 매화는 이미 저 아쉽게도 꽃을 볼 수 없었다. 오죽헌(烏竹軒)의 상징적인 오죽은 여느 대나무와 달리 줄기가 검어 부치진 이름이다. 오랜 세월동안 두 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지켜보며 자랐을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팔폭병풍’은 화제가 말하듯 '수박과 들쥐' '가지와 방아깨비"'오이와 개구리.'맨드라미와 쇠똥구리.' '양귀비꽃과 도마뱀' '원추리와 개구리' 여뀌와 사마귀' '도라지와 부용화. 등 여덟 가지 식물과 동물, 곤충을 주제로 삼아 혹은 움츠리고 앉아 있거나, 혹은 꽃을 처다 보는 모습이 섬세하면서도 다소 해학적으로 그려져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초충도가 감동하게 하는 것은 첫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개구리, 여치 등 하찮은(?) 미물(微物)까지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 사임당의 자연관과 둘째, 가지, 오이, 수박 등 외국에서 들어온 농작물의 재배가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인 16세기 초에 이미 보편화되었음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8폭병풍도’ 중에서 제8쪽 '여뀌와 사마귀'의 여뀌는 '노인장대'가 바른 식물이름이다.

현모양처의 사표로 존경받는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10)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인선(仁善)이었으며 어머니가 무남독녀였기에 결혼을 했으나 그는 쭉 강릉 외가에서 살았다. 아버지 신명화(申命和) 역시 그림을 좋아 하는 사람으로 좋은 그림이 있으면 친구들로부터 빌려 보았다고 한다.

이런 집안 분위기 탓인지 신사임당은 6살 때 아버지가 빌려온 안견의 산수화를 보고 거의 똑같이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해 그 때 이미 그의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꽃과 나무를 좋아해서 그런지 오죽헌은 작은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꽃이 있으니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숲이 있으니 새와 곤충이 깃드니 이런 생물들은 어린 소녀 인선의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역작 초충도는 이런 분위기에 의해 구체화 된 작품일 것이다.

사임당(師任堂)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이 문왕을 잉태했을 때 바르지 않는 것은 '보지도, 듣지도, 먹지도 않았다'는 고사를 읽고 본받고자 하는 뜻에서 스승 사(師)자와 태임의 맡길 임(任)자를 따와서 부인을 가리키는 당(堂)을 더해  스스로 지은 것이라 한다.

18살에 서울에 사는 이원수라는 사람과 혼인을 했으나 친정에 그대로 살면서 건강이 좋지 못했던 부모님, 특히 아버지를 돌보고 반대로 남편 이원수가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신혼생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사임당은 삼년상을 치른 뒤 마침내 서울 시집으로 들어갔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는 이 시는 그가 서울 시집에서 강릉 친정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대관령에서 쓴 시라고 한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두고 오는 애틋한 마음을 읊었다. 그가 일생을 통하여 남긴 3편의 시 중 한 편이다.

알뜰살뜰한 사임당의 내조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좀처럼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며 그녀가 그린 그림이 맨드라미꽃이었다. 맨드라미는 다른 말로 계관화(鷄冠花) 즉 닭벼슬꽃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는 닭의 벼슬처럼 벼슬을 뜻한다. 사임당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느끼는 남편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 때문에 여느 여인들처럼 바가지를 끓는 대신 조용한 마음으로 합격을 기원하며 맨드라미를 자주 그렸던 것이다. 얼마나 재치 있고 현명하고 사려 깊은 처신인가? 이러한 그의 간절한 염원이 헛되지 않았던지 마침내 남편이 고대하든 급제를 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마(魔)가 있다던가. 얼마 후 사임당은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때 남편은 큰아들 선과 셋째 아들 이와 함께 평안도에서 공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집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이 사실을 남편과 아이들에게 알리려고 하였으나 사임당은 나랏일이 먼저라고 하며 남편을 부르지 못하게 한 채 눈을 감았다.

1551년(명종 6)그의 나이 47세, 지천명에도 이르지 못한 인생의 완숙기에 4남 3녀를 남겨두고 이승을 떠났다. 문신 어숙권은 <패관잡기>라는 그의 책에서 '신씨는 어려서부터 그림 공부를 하였는데 그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세종 때의 화가 안견에 버금간다.'고 하였다.

사임당은 예술가로 일가를 이루기도 했지만, 기호학파의 종조인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를 길러 낸 현모양처로 자리 매김 되면서 오히려 시대를 초월해 존경 받고 있다.

특히 어머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이이는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 주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15살에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을 맞아서는 한 치 흐트러짐 없이 3년 동안 시묘사리를 한 효자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기도 했다. 조선은 국교가 유교였고, 배불숭유정책이 국가의 통치이념이었으므로 훗날 이 경력이 반대편 유학자들에 의해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1년여 불교공부를 한 후 하산한 그는 스스로 몸가짐을 경계하는 자경문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하면서 1558년(명종 13)년 그의 나이 22살 그는 멀리 예안에 있던 퇴계 이황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는다. 이 때 영남학파의 종장인 퇴계는 57세였다. 한창 학문에 몰두하고 있는 신진학자와 완숙한 노학자의 만남이다. 그 후 두 사람은 편지를 통 해 여러 차례 학문을 논하나 지향하는 바는 달랐다. 1564년(명종 19) 문과 급제를 시작으로 무려 9번이나 장원 급제하여 세상에서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렀다고 한다. 처음 호조좌랑에 임명된 이후 이조좌랑, 지평 등 초급관리를 지내다가 1568년(선조 1)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581년(선조 14) 대사헌,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홍문관, 예문관의 양관 대제학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는 이조, 형조,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선조 16)에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가 같은 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아까운 나이인 4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저서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있으며,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후학들에 의해 자운서원에 모셔져 있다.

대한민국 5,000원 권 지폐에는 율곡 이이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향후 발매될 50,000원 권의 지폐에는 어머니 사임당의 초상화가 그려질 것이라 하니 두 분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있다. 








'나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친상간의 단초를 제공한 나무  (0) 2006.07.20
세한도  (0) 2006.07.20
보호 대책이 시급한 주산지의 왕버들  (0) 2006.07.20
해당화  (0) 2006.07.20
행단의 나무는 은행나무일까 살구나무일까  (1) 200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