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조광조와 주초위왕

이정웅 2006. 7. 20. 22:09
 

 

 



정암 조광조

경복궁 조경지 내 뽕나무

국내외 관광객으로 붐비는 경복궁

경회루


정암 조광조 선생의 몰락과 경복궁 뽕나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조선은 억불숭유정책으로 많은 유학자를 길러내며 문치를 강조했으나 무오(戊午갑자(甲子) 사화로 그동안 형성된 사림이 희생된 데 이어 1519(중종 14) 반정공신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개혁의 주인공 조광조를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이 크게 몰락했다.

11대 중종(1488~1544)은 전임 연산(燕山)을 몰아낸 원로파에 의해 왕위에 올라 집권 기반이 취약했다. 나이 또한 어려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고 노회한 그들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때 중종을 도울 혜성같이 나타난 인물이 바로 정암(靜菴) 조광조(1482~1519)였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그와 지지자들은 향약과 소학을 장려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산림에 묻혀 살던 인재를 등용하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는 한편, 103명의 반정공신(反正功臣) 중 공적이 없거나 턱없이 등급이 높게 책정된 2~3등 공신 일부와 4등 공신 전원 등 모두 76인의 훈공(勳功)을 삭탈했다.

이러한 그의 과감한 개혁은 일부 기득권자들의 반대와 그를 아끼든 중종마저 거리를 두게 했다. 정암은 본관이 한양으로 감찰을 지낸 조원강(趙元綱)의 아들이다. 스승이자 훗날 그가 주도해 문묘에 배향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만난 것은 아버지가 어천(魚川,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 찰방(察訪)이 되자 그곳에 따라갔다가 무오사화로 유배되었던 한훤당의 제자가 된 데서 비롯된다. 다소 늦은 33살에 급제하였지만 4년여 만인 37살에 종2품인 대사헌으로 초고속 승진한 실력파였다.

그런 그가 뜻을 다 펴보지도 못하고 화를 입은 것은 한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 때문이다. 홍경주(洪景舟)가 딸 즉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를 시켜 나뭇잎에 과즙을 발라 벌레가 갉아먹도록 하여 모함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주초(走肖)’()’ 자의 파자(破字)인바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마침내 사약을 받아 희생되고 그를 추종하든 많은 동료 후배들이 화를 입었다.

그런데 이 음모에 가담한 나무가 도대체 어느 나무일까? 나무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궁궐의 우리 나무(박상진)에 의하면 궁궐 안에는 배롱나무, 함박꽃나무, 서어나무, 자귀나무, 버드나무, 살구나무, 소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있고 플라타너스 등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나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나무 중에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나무는 글쓰기에 편리한 잎이 넓은 활엽수이어야 하고, 다음은 벌레들이 잘 갉아 먹는 잎을 가진 나무여야 하며, 궁궐 안에 있으며, 많은 사람의 눈에 쉽게 눈에 띄어야 한다. 이런 요소를 감안(勘案)하면 뽕나무일 확률이 가장 높다.

잎이 넓어 글씨쓰기도 좋지만 다른 벌레들이 잘 갉아 먹고, 더 나아가 친잠례(親蠶禮)를 위해 궁궐 안에 재배되고, 누에 치는 궁녀들이 쉽게 목격할 수 있어 입소문이 널리 퍼질 수 있다.

친잠례는 양잠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예로 조선 태종 때에 시작되었다. 궁중에서 중전, 세자빈이 친히 거행하였다. 폭군 연산군 때도 시행되었으며 1518(중종 13) 즉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에도 시행되었다. 이런 점에서 뽕나무를 법인으로 단죄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지난 한글날 상경하여 광화문 집회(集會)에 나갔다가 잠시 틈을 내 경복궁을 찾았다. 경회루 건너편 조경지에서 뽕나무를 보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희생된 정암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주 완사천에서 빨래하든 한 처녀가 목마른 장수(왕건)에게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어 왕비(장화 왕후)로 신분 상승의 행운을 누린 데 비하여 조선을 참다운 나라로 개혁하고자 했던 정암은 뽕나무 잎으로 오히려 실각 되는 불행을 누린 역설은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실각한 정암은 화순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조선의 통치 철학이 되었으며 이황이나 이이 등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사림의 표상이 되었다.

1568(선조 1)에 죄가 풀리면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그 역시 스승 한훤당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다. 용인시 수지구 심곡서원, 화순의 죽수서원, 서울 도봉구의 도봉서원 등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 정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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