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마지막 황제 순종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뱔견

이정웅 2006. 8. 19. 16:26

오른쪽 가이즈까향나무가 순종황제가 심은 나무로 추정됨  

 

거리문화시민연대 권상구 대표로부터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대구에 오셨을 때 심은 나무가 있다는데 알고 있느냐?’는 전화가 왔었다. 모른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나는 조금은 당황했다.

오래 동안 녹지부서에 근무를 하면서 전국 최고의 무더운 도시 대구의 오명(汚名)을 벗겼을 만큼 많은 나무를 심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오래된 노거수를 보존하기 위하여 보호수 지정을 획기적으로 늘렸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속의 인물과 나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록 보호수는 아니더라도 그 나무와 연관된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여 화가 이인성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를 찾아서 ‘이인성 나무’라고 하는 등 나무를 보호했었는데 그것도 평민이 아닌 황제(皇帝)가 대구의 달성공원에 나무를 심었다는 나무를 모르고 있다니 말이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순종 황제가 대구에 온 내용이 실린 책 <대구이야기, 같은 달구벌 얼찾는 모임 회원인 전 중구문화원 사무국장 손필헌 님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한국으로 건너와 1904년 대구에 정착한 일본 거류민의 한 사람인  카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1930년까지 26년 간 대구에 살면서 당시 상황과 체험담을 기록한  대구물어(大邱物語)를 번역한 책>을 보면서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하게도 지존(至尊)인 황제의 순행(巡幸) 모습을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닌 모리배(謀利輩)인 일본 상인이 쓴 책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909년 1월 7일 오후 3시 20분 착의 궁정열차로 대구에 도착하셨다. 하늘에 영광이요, 땅에는 축복이라 한·일 수많은 민중이 천지를 흔드는 환호 속에서 인금님이 탄 수레를 맞이하였다. 폐하의 차가 출발하자 군악대가 국가를 취주(吹奏) 하는데 그 장엄한 기운이 사방을 제압하고 맞이하는 관리나 시민 모두가 최고의 경례를 드리는 가운데 폐하는 덮개가 없는 수레에서 가볍게 인사하시며 숙소에 들지 않으시고 의병장을 앞세워 행렬도 엄숙한 도열 속으로 지나셨다.


                               -중략-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황제

 달성공원 정문


폐하께서는 남한 순행의 첫날을 대구에서 보내시고 이튿날 8일 오전 9시 10분 부산으로 출발하시는데 부산, 마산의 순찰을 마치시는 12일에는 대구에 다시 오셔서 하루를 묵게 되시니 대구로서는 이중의 광영(光榮)이었다.”


“황제 폐하의 귀경길인 12일 오전 11시 이등박문과 함께 마산으로부터 봉련(鳳輦=꼭대기에 금동(金銅)의 봉황을 달아 놓은 임금님이 타는 가마)이 다시 대구에 안착하였다. 황제의 위엄은 앞서보다 더 장엄하고 시내의 장식도 지난번보다 더 한층 화려했다. 당일 달성공원에 나오셔서 폐하 손수 식수와 이등박문의 기념식수가 있었다.”


이상은 순종황제가 대구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부산, 마산을 거쳐 대구로 다시 되돌아 온 장면에 관한 <대구물어>의 기록을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순종 황제는 조칙(詔勅)을 통해 ‘짐이 생각하건데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이에 시정개선의 대 결심을 하고·····지방 각지의 소요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서민의 고통은 계속 되고 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하물며 이 추위를 당한 백성의 곤궁함이 눈에 선한데 어찌 한 시라도 금의옥식(錦衣玉食) 혼자만 안주하랴·····’라고 순행 목적을 밝히셨다.

즉 황제라는 사람이 백성들의 고통을 모르는 채 하고 궁중에서 비단 옷과 맛있는 음식만 먹고 앉아 있을 수 없어 이 엄동에 지방시찰을 나섰으니 수행하는 사람들은 황제의 이런 뜻을 깊이 명심하라며 또한 이등박문을 순행을 동참시킨 이유로 국정을 도와줄 뿐 아니라,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태자(太子)를 잘 가르쳐 고마운 마음에 함께 하였다고 부연(敷衍)했다.

뒷이야기를 보면 황제가 가는 길을 갑자기 넓히고 그 것도 모자라 험한 곳은 천으로 둘러쳐 대구의 옥양목(玉洋木)이 동 났다고 한다. 순종황제의 대구방문은 시민들의 사기를 높였고, 도로축조 등으로 개발이 앞당겨 졌던 것은 사실이나 하필 다른 곳을 놔두고 왜 대구를 선택하였느냐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없으나 이는 아마 두 해전인 1907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 시사하듯 대구를 더 이상 방치한다면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지 아니할까 하는 우려를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일본이 황제를 앞세워 민심을 무마하려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기념식수를 했다는 기록은 찾았으나 무슨 나무인지,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특히 대구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은 모두 해방이후 창건 되었고, 비교적 오래되었다는  조선·동아도 1920년대에 발간되었으니 1909년도 기록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대구물어>의 저자 아사오에 의하면 황제의 대구순행을 일본의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한적한 도시 대구가 일본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나 그 일본 신문 역시 입수하기 쉽지 않는 일이다. 고심을 거듭하든 끝에 다방면에 박식한 ‘얼 찾는··· 모임’의 회원이자 공교롭게도 현재 달성공원 관리계장인 이대영님께 당시신문이나 정부기록을 열람하거나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불과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전화가 왔다. 나무가 현존(現存)하고 있으며, 가이즈까향나무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서울대학교 임학과 출신이면서 대구시 여러 부서에 고위직으로 계시다가 퇴직한 후 주로 오래된 노거수를 찾아다니시는 정시식님께 연락을 하고 함께 확인작업을 시작했다.

 2006년 8월 19일 오전 휴일인데도 이 계장이 일부러 나와 기다렸다. 일러 준 곳을 보니 크기가 비슷한 두 그루의 가이즈까가 나란히 서 있는 폼이 계획적으로 심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우선 뿌리둘레를 측정해 보니 한 때 신사(神社)가 있었던 곳에서 보아 좌측편의 나무는 285cm, 오른편은 276cm 였다. 당시 이등박문은 66세 순종황제는 33세였으니 만약 나이에 맞춰 심었다면 더 굵은 수령 163년이 이등박문, 작은 것 수령130년이 순종황제가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럴 겨우 일국의 황제인 순종은 좌측에 이등박문은 우측에 심어야 하는 데 그 반대인 만큼 이 기념식수에서도 황제의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나쁜 음모가 숨어 있지 아니할까 의심이 든다. 칙서에서는 이등박문이 황제를 수행했다고 표현했지만 <대구물어>의 저자는 이등박문이 황제보다 오히려 더 당당해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한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그 당당했던 이등박문은 그해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射殺)되고, 순종 황제 역시 이듬해 8월 일본의 병합으로 자리를 잃고 500여 년을 지켜온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고 만다. 대구의 본향인 달성 역시 신사(神社)가 들어서는 등 더렵혀진다. 시민의 휴식처로 변한 공원의 중심지에 떡 버티고 있는 가이즈까향나무 역시 영광과 오욕(汚辱)을 함께 가진 역사의 부스럼 같은 존재이기는 하나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심은 나무만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만큼 기리 보존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