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필재가 죽은 아들 목아를 위해 심은 느티나무(함양초등학교)
뿌리부눈 여느 느티나무와 달리 판근(板根) 즉 판자모양형태를 취하고 있다.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학사루
조선 전기 수십 명의 인재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 길에 나선 대사건이 바로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여느 사화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많은 선비들이 화(禍)를 입은 사건이라 하여 선비 사(士), 재앙 화(禍),를 써서 사화(士禍)라기도 하고, 정치적 이념이나 정책 대결이 아니라 실록에 게재될 사료(史料)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사기 사(史)와 재앙 화(禍)를 써서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특히 사화가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된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빗대어 쓴 글)의 저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이미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유택에서 끌려나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당했다. 점필재(佔畢齋,김종직의 호)를 일러 영남사람파의 종조(宗祖)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고향 선산으로 내려와 채미정을 짓고 은거하고 있던 야은 길재(吉再)에게 성리학을 배운 감숙자의 아들이다 .당시 젊은이들이 다 그렇듯이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두 번 째 도전했던 1459년(세조 5) 28세 때 문과에 합격,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박사, 감찰 등을 두루 지내다가 1464년(세조 10) 세조가 천문, 지리, 음양학 등 잡학을 공부한다고 비판하다가 파직된다. 그러나 이듬 해 경상도병마평사란 직책을 부여 받으며 다시 출사하면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접어든다. 1467년 수찬, 이듬 해 이조좌랑 등 세조, 예종을 거쳐, 1471년(성종 1)에는 예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외직을 희망했다. 마침 성종은 고향 밀양이 가까운 함양군수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지리산을 끼고 있는 함양은 어느 지역보다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이다. 어느 날 관내를 순찰하다가 신라 때 태수로 있던 최치원이 지었다는 학사루에 으르니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간신 김안로의 시가 걸려있자 떼어내게 한 것이 그와 사감(私感)을 가지게 된 동기가 되었다.
당시 함양군이 조정에 올려 보내는 진상(進上)물품 중에는 차(茶)가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군내 어느 곳에서도 차가 생산되지 않았다. 이로 인한 백성들의 폐단은 엄청나게 컸다. 왜냐하면 부과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웃 고을 즉 차가 생산되는 고장에 가서 사서 납부해야 하는 데 쌀 한 말을 줘야 차 한 홉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폐단으로부터 군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官)에서 여기저기 구걸해 납부했다고 한다. 선생은 828년(신라 흥덕왕 4) 견당사로 중국에 갔던 김대렴(金大廉)이라는 사람이 차씨를 가져와 하동, 구례, 산청, 함양 등에 심었다고 하는 기록을 보고 ‘아 우리 군이 바로 이 산 밑에 있는데 어찌 신라 때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하면서 혹 흔적이라도 없을까 하여 나이 많은 분들에게 조사를 시켰더니 그 결과 엄천사(嚴川寺)북쪽 편 대밭 속에 두어 그루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기뻐하며 그 땅을 차밭 즉 다원(茶園)으로 만들고 그 소회를 두 편의 시로 남기니 다음과 같다.
茶園 二首 幷敍(다원에 대하여 두 수를 짓다)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지리산을 말함=필자)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하게 되어 또한 기쁘다.
대숲 밖 거친 동산 일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紫英茶), 조취차(鳥嘴茶)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 같은 명차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점필재의 길지 않는 생애에 중에 함양군수 시절이 개인적으로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든가 한다. 고향이 가까운 고을이라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농업용수시설을 개수하는 등 선정을 펼치자 곳곳마다 그를 기리는 선정비와 생사당이 들어설 정도로 주민들에게 널리 존경 받았으며 비록 무오사화로 일찍 이승을 마감했지만 김일손과 정여창, 김굉필 등 훌륭한 제자를 키워 후일 그들이 영남학파는 물론 조선 성리학의 맥을 이어 나갔으니 이보다 더 한 행복한 시간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호사다마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이는 법 1474년(성종 5)마흔을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이 목아(木兒)가 죽고 만다. 그 애절한 심정을 한 그루 나무를 심고 읊으니 애통하기 그지없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개 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 하구나
오늘 날 함양초등학교 교정을 지키고 있는 이 나무가 어린 목아를 위해 심은 나무다, 천연기념물 제000호로 나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라는 좋은 터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런지 점필재에 대한 군민의 사랑이 아직도 식지 않고 있어 그런지 500여 년의 세월을 버텨왔으면서도 수세가 왕성하다. 특히 여느 느티나무와 달리 판근(板根) ‘책받침 같은 뿌리’가 잘 발달되어 있어 학술적으로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학사루는 말없이 그대로 낮선 사람을 맞고 있는데 다세(茶稅)로부터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애써 씨를 구해 만들었던 다원은 표석만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 황량하기 그지없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내한성(耐寒性)에 문제가 있어 복원이 안 된다고 하나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현재 대구의 팔공산에서도 차재배가 가능하다. 한 목민관이 백성들의 고달 품을 풀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만든 관영차밭으로, 조성 동기나 식물재배 역사의 현장으로 볼 때 사적으로 지정되어도 충분할 것 같으나 미루고 있다는 것은 가깝게는 군, 멀게는 도나 나라의 수치다. 하루 빨리 복원해 선생이 시(詩)에서 말한 것처럼 비록 명차를 만들지는 못해도 비리로 얼룩진 오늘날의 관료사회에 백성을 사랑한 선생의 애민정신의 교훈이 되도록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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