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초보은의 풀 그령
그령을 묶은 모양 말의 발이 여기에 결려 넘어졌다.
그령, 결초보은의 풀
풀을 엮어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이는 공자(孔子)가 지은 중국 최초 역사서 춘추(春秋)를 주석한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5년 조(條)에 나오는 말로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춘추시대, 진(晉)나라에 위무자(魏武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병이 들어 정신이 오락가락했는데 가끔 아들 과(顆)를 불러 놓고 정신이 맑을 때에는 자신이 죽거든 애첩(愛妾) 즉 아들, 과의 서모(庶母)를 개가(改嫁)시키라고 하였다가 정신이 몽롱할 때에는 함께 무덤에 묻어 달랐고 하였다.
그러던 위무자가 마침내 죽었다. 과는 서모를 아버지와 함께 묻지 아니하고 개가를 시켰다. 주변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버지 영(令)을 따르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사람이 병이 깊으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저는 아버님이 정신이 맑을 때 하신 말씀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후 과는 전장에 나아가 이웃 진(秦)나라 환공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맞싸우게 되었다. 그때 진(秦)나라에는 두회(杜回)라는 용맹한 장수가 있었다. 과로서는 매우 힘든 싸움이었고 밀려오는 군사들로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말을 타고 공격해 오던 두회가 갑자기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져 과가 오히려 두회를 사로잡게 되었다. 지략이 뛰어난 장수 두회와 그의 용맹한 군사들이 어떤 연유로 넘어졌는지 궁금해 현장을 살펴보았더니 누군가 풀을 묶어 달리던 말이 발에 걸려 넘어지도록 해 놓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런데 꿈속에 한 노인 나타나더니 “나는 당신 서모의 아비 되는 사람이다. 그대가 선친의 바른 유언(遺言)을 따랐기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내 딸이 살았으므로 내가 그 은혜를 갚은 것이요” 하였다.
우리는 이 고사성어를 통해 비록 엄한 부모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가려서 들어야 한다는 판단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는 되돌아온다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나도 어린 시절 풀을 엮어 친구들을 괴롭힌 적이 있었다. 물자가 풍족하지 못했던 1950∼60년대 시골에는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별로 없었다. 나무줄기를 다듬어 작은 막대기를 내려쳐 멀리 보내 승부를 결정하는 ‘자치기’나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엽전이나 비슷한 것으로 수술을 달아 만든 제기를 발로 차서 그 수를 헤아려 승자를 결정하는 ‘제기차기’ 등이 고작이었다. 혹 명절을 앞두고 마을에서 돼지를 잡는 날에는 어르신들을 졸라 오줌보를 얻어 바람을 넣어 ‘공차기’를 하는 날은 재수 좋은 날이었다. 그도 저도 아니면 또래들과 마을 뒷산에 올라가 ‘고상받기’도 했다. 오늘날 레슬링(?)과 같이 상대방을 꼼짝 못 하게 눕혀 놓고 팔다리를 결박하거나 조여 ‘고상’하고 큰 소리로 항복하면 풀어주던 놀이도 하다가 그것마저 지겨우면 길가에 자라는 풀을 친구 몰래 묶어 뒤따라오다가 걸려서 넘어지면 재미있어했다.
노년이 된 지금 고향을 찾으면 그때 밀사리, 콩서리를 즐겼던 친구들 중 몇 명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즐겁게 뒹굴며 놀던 뒷산도 과수원으로 변해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대처로 나와 도시 생활에 익숙한 어느 날 산책을 하기 위해 공원을 찾았더니 누군가 등산로에 풀을 묶어 놓았다. 문득 나처럼 친구를 괴롭혔던 추억을 생각하며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아울러 이 풀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더구나 많은 세월을 나무와 풀을 가까이하며 살아온 터라 의무감 같은 것도 느꼈다.
집에 와서 도감을 보았더니 높이가 30cm~80cm로 자라고, 8~9월에 흰색의 아주 작은 꽃이 피며, 길가나 집 근처에 주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줄기가 뭉쳐 나와 큰 포기를 이루는 벼과의 그령(Eragrostis ferruginea(Thunb) Beauv.)이었다. 북한에서는 암그령이라 했다.
그령이 고사(古事)가 태어난 중국에도 자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경(詩經) 위풍(魏風) 즉 위나라의 노래를 통해 복숭아, 대추나무, 박달나무 등 우리나라와 같은 종류의 나무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투가 치러졌던 시기는 여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힘차게 달려오던 말발에 걸려도 끊어지지 않으려면 줄기가 튼튼하게 자랐을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령은 잎이 뻣뻣한 억새와 달리 묶기도 좋지만 부드러운 바랭이와 달리 잘 끊어지지 않는 질긴 풀이다. 맨살에 닿으면 촉감도 좋다. 지구상의 모든 풀 즉 그들이 자라는 곳이 산이든, 들이든, 또 쓰이는 곳이 약용이나 식용이든 저마다 존재 이유가 있다. 설령 없다면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을 이해하면 비록 하찮게(?) 보이는 길섶의 연약한 풀 한 포기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밟아서는 안 되는 귀중한 생명체라는 것을 그령이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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