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초는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 2급식물이다.
고란사
팔공산은 대구를 상징하거니와 민족의 영산(靈山)으로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산이자 식물 또한 다양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다.
산지보전협회의 모(某) 박사의 경우, 팔공산에 자라는 식생(植生)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은 분으로 말하자면 ‘팔공산 박사’이다.
그 외에도 내용을 약간씩 달리하면서 임학은 물론 생물학을 전공하는 역내(域內) 학자들의 단골 연구 대상이 또한 팔공산이다.
따라서 팔공산은 어느 산보다 식물에 관한 조사연구가 활발했었다.
그런데도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는 사실은 확인(確認)되지 못했다.
나는 다른 분야 즉 문화사적(文化史的)인 측면에서 팔공산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어 무던히도 돌아다녔고, 그 결과 내용이 빈약하나마 ‘팔공산을 아십니까’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나, ‘92년 어느 골짜기에서 고란초(皐蘭草)를 발견함으로써 식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야생화에도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나는 이 생전 처음 보는 (고교 재학 시 수학여행지인 부여 부소산에서 안본 것은 아니지만 그때에는 건성으로 보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희한한 풀에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집에 와서 도감과 대조해 보니 틀림없이 고란초였다.
실로 감개가 무량하고, 학자들에게도 외면되었던 이 여린 풀이 나에 의해 발견된 사실만으로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식물분류학의 대가인 모 박사님께 간청하여 현장을 답사했다.
그러나 대답은 팔공산에 자랄 수 있는 풀이 아니고 어쩌면 산일엽초(山日葉草)의 변이종일 것이라고 했다.
그 동안 들떠 있던 내 마음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속으로 ‘이게 아닌데 틀림없이 고란초인데····’ 되뇌었나, 권위 있는 학자의 검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혹시나 하고 또 다른 교수님께 부탁을 드려 다시 현장을 찾았으나 그분 역시 “가능성은 있으나 꼭 맞다 할 수는 없다”고 해 낙담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 귀한 풀이 어떻게 못난 내게 발견되는 행운이 있으랴’
심지어는 지금까지 살아온 잘못된 내 삶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낭패감마저 들었다.
다시는 고란초 얘기를 꺼내지 않고 덮어두었지만, 그것은 휴화산과 같이 가슴에 묻어 둔 것이지 정말 관심 밖으로 밀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든 어느 날 계명문화대학 김용원 교수를 만났더니 충청남도 농촌진흥원에서 고란초 증식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표본을 들고 대전으로 향했다.
진흥원을 찾아가 연구진에게 보였더니 ‘똑같다’는 답이 나왔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배양실에 들어서니 혹은 돌에, 혹은 썩은 나무에 많은 개체를 붙여 놓았고 견본과 다른 점이 없었다.
실내에는 ‘백제 천 년의 얼 고란초 증식실’이라고 써 있었다. 부여 부소산의 자생지가 관광객들에 의해 훼손되어 이곳에서 증식해 원산지에 복원을 하고 나머지는 지역특산품으로 개발할 것이며 서울 대학교 교수를 지낸 이창복 박사의 지도로 이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차창으로 전개되는 풍경이 새롭고 즐거웠다.
팔공산에 고란초가 자생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어 간부회의에 제출하였더니 큰 화제가 되었다고 했다.
당시는 노태우 정부로부터 김영삼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는 시점이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등 이른바 군사정권에 맞섰던 김영삼씨가 정권을 잡아 오랜 기간 군사정부에 참여해온 시장을 비롯한 간부 공무원들의 거취가 불분명하던 때라 회의가 열려도 분위기가 늘 무거웠었는데, 그날은 고란초 이야기로 모처럼 화기애애하게 전개되었다는 이야기를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간부 공무원으로부터 들었다.
따지고 보면 하나의 풀일 뿐인 이 식물이 많은 이야기를 제공한 셈이 된다.
늘 푸르며 다년생으로 그늘진 바위틈에 자라고 포자(胞子)로 번식되며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어 환경부가 보호 대상 식물로 지정하여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이 풀은 원래 원효대사가 발견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대사가 백강(白江) 물을 마셔 보고 상류에 진란(眞蘭)과 고란(皐蘭)이 있음을 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부소산에서 발견했는데 그 후 진란은 사라지고 고란만 오늘날까지 전해 온다고 한다.
일설에는 고란사(皐蘭寺) 뒤에 있는 약수를 백제 왕실에서 길어다 마셨는데 물맛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하여 잎을 띄워 오게 했다고도 하고, 다른 설에는 약수를 떠 오는 병사들이 귀찮아 다른 곳의 샘물을 길어오자 증표(證票)로 반드시 고란초 잎을 띄워오게 해 다른 곳의 샘물을 떠오지 못하게 했다고도 한다.
고란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난과(蘭科)의 식물로 알고 있으나 난과와는 다른 고란초과의 식물이며 따라서 특별한 향기도 없다.
이런 점을 볼 때 두 가지의 이야기 중에서 후자 즉 고란사 뒤쪽의 약수를 길어오는 증표로 고란초를 띄워 오게 한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이 식물의 발견으로 신문에도 나고 TV에도 출연해 일약 스타(?)가 되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조사를 위해 팔공산을 이 잡듯이 뒤졌을 수많은 식물학자들을 제쳐두고 왜 그들보다 전문성이 뒤진 내게 그 귀한 풀이 발견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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