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15세기 대일국제무역항 화원

이정웅 2008. 1. 9. 07:22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무역선이 드나들었던 나동강(현풍 일대) ,당시 화원에는 삼포에서 일본상인으로부터 구입한 물품을  보관했다가 나라에서 필요한 것은 가져가고  민간인에게는 현지에서  팔던 왜물고가 있었다.



최근 한반도 대운하(運河)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다. 얼마 전, 정확히 말해서 이병박 후보가 당선되기 전만해도 보도는 있되 환경오염이 우려된다. 국토를 훼손한다는 등 부정 일변도였는데 불과 한 달도 안 된 지금은 보도건수가 늘어난 것은 차치하고, 친환경적이다. 물류비용을 절감한다. 등 긍정적인 보도가 많아 세상이 달라졌기로서니 이렇게 빨리 달라졌나 싶어 오히려 어리둥절하다. 필자는 운하가 국토의 균형발전을 촉진할지 또는 환경재앙을 초래할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민족이 수운(水運)을 이용하기 위한 노력은 벌써부터 논의해 왔었고 실제 또 이용해왔다는 사실은 안다. 특히 낙동강이 서남부를 에워싸고, 시가지 북단의 동서를 금호강이 흐르고 있는 대구는 그 발달자체가 사통팔달 편리한 육운(陸運)과 수운(水運)의 영향이 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 때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았던 매운탕의 명소 강창(江倉)은 대구와 인근고을의 조세(租稅)를 저장하던 창고가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곳이다.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지금의 달성군 화원(花園)은 500여 년 전 15세기에 우리나라 유일한 대일국제무역항이었다는 사실이다. 대구시가 나름대로 한반도대운하계획과 연계한 자체 계획을 수립하겠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도 참고했으면 해서 밝혀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주목 창고 조에 ‘화원창 : 예전에는 인흥사를 빌려서 본현의 군수(軍需) 미곡을 저장하였는데 우리 세조 때에 현 읍내 남쪽에 따로 세웠다. 외국 사신이 가져오는 동, 철, 소목(蘇木, 약재의 일종)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여기에 갖다 저장하여 지출하고 사용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는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 성종 3년(1472) 6월 정해 조에 “왜사일행이 바치는 동, 철, 소목이 거의 거의 3천 4백 태(駄)에 이르러 농사철에는 그 운반을 위한 농민들의 부담이 크다. 이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항구에서 백성들에게 무역을 허락하면 편할 것 같으나 이익만을 노린 사람들이 가만히 금수품(禁輸品)을 거래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므로 그 것은 불가하다. 부득이 이후부터 왜인(倭人)이 바치는 물건은 선군(船軍)을 시켜 배에 실어 성주목 화원현에 옮겨 보관했다가 국용(國用)에 쓰일 것은 농한기를 가려 서울로 올리고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팔도록 하라고 아뢰자 왕이 그러하라 해서 이에 따른다.” 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원에 오늘 날 조달청 같은 기관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이 것을 일본 물건을 보관하는 곳간이라 하여 왜물고(倭物庫)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내륙에 위치한 화원에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대일(對日)무역창고가 설치되었을까? 첫째, 종전까지 우리 조정이 허용했던 사무역(私貿易)에서, 수입을 금지한 품목이나 수출을 금지한 품목이 몰래 거래되는 폐단이 발생하고, 둘째, 거래를 빙자해서 나라의 정보를 일본상인이 몰래 빼내가며, 셋째, 개인 간에 거래 시 잦은 다툼이 일어났기 때문에 세조말년에는 사무역을 전면 금지 시키고 육운과 수운이 편리한 화원이 선택되었다고 보여 진다.

당시 일본의 대 조선 무역은 부산포(동래), 재포(웅천), 염포(울산) 등 삼포(三浦)에 들어오는 일본상품은 모두 국가가 매입해 양산 동완진( 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에 모아 다시 배에 실어 낙동강을 거슬러 오기를 7~8일 만에 화원에  닿았다고 한다.

당시 수입품은 말, 구리, 납, 철, 금, 은, 백반, 감초, 장뇌, 침향, 물소뿔, 설탕, 상아, 향료 등이 주종인 반면, 수출품은 면포(綿布), 모시, 삼베 등 직물류와 인삼, 꿀, 잣, 모피(毛皮) 등이었으며, 화원창에 수장된 물품은 농한기에 관수품은 서울로 보내지고, 민수품(民需品)은 현장에서 매각하였다고 한다.  

이후 관의 지나친 개입이 오히려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자 1485년(성종16) 중신들 회의에서 사무역을 허가 하게 되자 삼포 등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며 화원창을 문을 닫고 화원나루터에 무역선의 그림자도 사라지게 되었다. 불과 14년여에 그쳤지만 15세기 화원은 한 때 대일무역의 전진기기였다. 따라서 한반도 대운하를 관리할 가칭 ‘운하관리청’이 대구에 있어도 무방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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