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미숙이의 옹골찬 도전

이정웅 2008. 3. 6. 22:56
사필귀정]‘미숙이’의 옹골찬 도전
새봄 향토 뮤지컬 ‘역수출’낭보, 도약 서두르는 지역민에 활력소
1960, 70년대만 해도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TV도 드물었고, 컴퓨터는 아직 없던 시절이라 해가 저물도록 뛰어놀았다. 입시니 사교육 같은 것에 찌들리지 않아도 됐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던 게 또 하나 있었다. 만화였다. 신나는 액션물에서부터 역사물, 전쟁물, 순정만화, 명랑물, 공상과학, 공포물 등에까지 만화 속 세상은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긴 세월이 흘렀으나 그 시절 만화의 주인공들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더러 엉터리 연구도 했었지만 물로 움직이는 자동차, 빵 만드는 기계를 발명했던 추동성의 ‘짱구박사’, 순정만화 대가 엄희자의 ‘네자매’, 김성환의 ‘꺼꾸리군 장다리군’도 거기서 만날 수 있었다. 만화 주인공들은 그 시절 아이들의 친구이자 로망이었다.

이후 TV의 대중화, 그리고 1990년대 들어 컴퓨터가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서 더 이상 아이들은 만화에 푹 빠지지 않게 됐다. 물론 지금의 중장년 세대에게 만화는 여전히 유년기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지난해 이맘때쯤이었을까, 대구 중앙통의 더 시티(옛 제일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한 편을 보았다. 그해 1월 18일부터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이 희곡에서부터 배우, 연출가, 작곡가, 무대의상 등에까지 100% 대구産(산) 뮤지컬이며, 꽤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입소문을 듣고서였다.

제목은 ‘만화방 미숙이’. 무대 위, 어둑한 조명의 허름한 만화방은 지난날의 ‘만화 키드(Kid:아이)’들에겐 금방 친숙함으로 다가왔다. PC방에 밀려 쇠락해 가는 만화방을 살려내기 위해 애쓰는 만화방집 3남매와 아버지, 자신이 만화 속 ‘둘리’인 줄로 착각하는 어리버리 청년, 김밥 장수 아줌마 등 서민들의 애환이 코믹하게 펼쳐졌다. 찰리 채플린 희극의 ‘웃음 속 눈물 한방울’처럼 가슴 찡한 감동도 배어나왔다.

이름 짜르르한 대형 뮤지컬들에 익숙한 관객들의 눈에 전체적인 짜임새는 좀 헐렁해 보이기는 했다. 뭔가 2% 빠진 듯한 느낌이랄까. 배우들도 거의가 무명이었다. 율동이나 노래들은 세련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대사는 대구사투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수 대구산 뮤지컬이라는 점이 고약한 편견을 작동하도록 거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뒷맛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관중석에서는 연방 웃음이 터져나왔고, 몇몇 배우들의 코믹 연기는 TV의 유명 개그맨 못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이 촌스러운 제목의 작품이 대구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놀랄 만한 롱런의 주역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해가 바뀐 지금, 그 ‘만화방 미숙이’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들고 있다. 당초 39회 예정을 훌쩍 뛰어넘어 장장 1년여 동안 218회 공연에 2만5천여명 이상의 관객 동원 기록을 남긴 것이다. 게다가 오는 13일부터는 대구 뮤지컬`연극 공연 사상 최초로 서울 장기 공연에 도전한다. 대학로의 예술극장 ‘나무와 돌’에서 한달 보름간 공연을 펼친다는 것. 1980년대 후반 문화게릴라 이윤택이 이끈 부산 연희단 거리패의 서울 진출 이후 이만큼 화끈한 지방 공연물의 서울 상경기도 없지 않나 싶다. ‘어디 한 번 맞붙어보자’는 배짱이 두둑해 보인다.

사는 게 갈수록 더 팍팍해진다고들 입을 모은다. 물가는 숭어뜀처럼 뛰어오르고, 대학 등록금 1천만원 시대에 안 그래도 개미허리가 된 부모들의 허리는 곧장 부러질 지경이다. 올봄엔 황사가 더욱 심할 거라는데 난데없이 영어 광풍마저 몰아쳐 사람 심사를 어지럽힌다. 총선을 앞두고 또 얼마나 많은 철새들이 오락가락할 것이며, 선거 뻐꾸기들은 또 얼마나 얌체짓을 할지…. 이래저래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다.

말 많고 탈도 많을 이 봄, ‘만화방 미숙이’의 용기 있는 도전이 봄꽃처럼 환하게 피어났으면 싶다. 오랜 겨울잠을 털고 새로운 비상을 향해 일어서려는 지역민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全 敬 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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