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대구사직단 복원 등 활용방안

이정웅 2008. 6. 24. 20:39

사직단 

 

조선 시대 도시의 구조는 대체로 수령이 집무(執務)를 수행하는 동헌으로 중심으로 서쪽에 사직단(社稷壇), 동쪽에 성황당(城隍堂), 북쪽에는 여제단(厲祭壇)을 두었다. 최근 복원되어 문화재로 지정된 수성구 노변동 사직단(대구시 기념물 제16호) 역시 경산현(慶山縣) 동헌의 서쪽이다.

각 고을의 사직단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이 고을의 번영과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이와 달리 성황당은 전통 민간 신앙의 대상인 성황신(城隍神)을 모신 곳이고, 여제단은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과학이 발달 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면이 있으나 전통사회 생활의 기본이 되는 농사를 망치거나 이름 모를 병으로 많은 사람이 쓰러져도 고칠 약이 없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신의 노여움과 본인이 정성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신에게 간절히 빌면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 신()이 재난을 막아주고 질병을 치료하는 일은 결코 없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 그런 의식을 통해서나마 위안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성황당이나 여제단은 백성들의 정신적 의지 처였다고 할 수 있다.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구 평산(, 평리동)에 사직단, 중구 연구산(連龜山)에 성황당, 북구 침산에 여제단을 두었었다. 이들 중 성황당이나 여제단은 주로 개인적인 일로 건강과 가정의 발복(發福)을 빌던 시설물이었지만 사직단은 수령이 고을의 수호와 주민의 안녕,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장소였다.

이러한 주민의 안위(安危)와 행복한 삶을 향상(向上)시키는 일은 오늘날 구정이나 시정의 책임자라 하여도 예외가 아닌 일이다. 따라서 사직제(社稷祭)를 현대에 와서 시행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대구시민과는 무관했던 경산현(慶山縣) 소속이었던 노변동 사직단을 많은 돈을 들여 복원하고 제례 올리며 이어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대구시가 선조들이 물려 준 대구 본디의 사직단은 팽개쳐 두고 엉뚱하게 경산 사직단을 복원하고 그것도 모자라 제사까지 지내는 것은 못마땅하다 못해 엉뚱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존심이 상하기는 경산시민도 마찬가지였던 지 얼마 전 새로 사직단을 만들었다.

대구는 역사가 길고 큰 고을이기 때문에 사직단 역시 여느 고을과 같이 조선 초기 이미 설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대구도호부 사묘(四廟) 조에 부의 서쪽에 있다.” 하였고, 1768(영조 44)대구읍지(大邱邑誌)대구부(, 경상감영공원)에서 서쪽으로 7(2.7km) 떨어진 평산(坪山)에 있다. 재실을 만들어 승려(僧侶)들에게 지키고 보호하게 하였다.”고 하였고, 1899(대한제국 광무 3)대구읍지(大邱邑誌)에는 ()에서 서쪽으로 7리 평산에 사직단 재실을 설치하여 승려들에게 지키며 보호하게 하고, 신실은 임자년에 창건하였다(在府西七里坪山, 設齊舍使僧守護,神室壬子創建).”라는 기록을 남겼으며 임자(壬子)년 즉 1792(정조16)에 사직단의 부속 시설 중 신실을 새로 지은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민족 고유의 사상이 녹아 있는 사직단, 성황당, 여제단은 1908(순종 2) 헐리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 사직단만이라도 복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터를 찾아 나섰다. 기존의 사료를 바탕으로 지적(地籍) 관련 서류를 검색한 결과 1910년에 제작한 일제강점기의 지적도에서 서구 평리동 1313번지 302평인 사사지(社寺地)를 발견했다.

일대는 1975년도에 구획 정리되었으며 소유자는 나라()였다. 즉 이때까지 만 해도 국유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1976년 동구 상동 모 씨로 소유권이 이전된 상태였다. 일대는 표고 39.5m~40.5m의 소위 평산(坪山)의 정상부였으며 당시 김형일(대구시 토지정보과) 사무관이 입수한 토지대장에는 평리동 1327-7, 1339-1, 1341-10, 1341-17, 1341-19, 1342-18, 1621-21 7필지로 분할 되어 있었다.

대구에는 현재 달성군 현풍사직단”, 수성구 노변동사직단(원래는 경산 소유)” 북구 읍내동사직단”, 최근 위치가 확인된 평리동사직단등 모두 4개의 사직단이 있고 그중에서 현풍 사직단이 가장 먼저, 다음 노변동사직단이 복원되었고, 읍내동사직단은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나 토지가 민간 소유라 동의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평리동 사직단은 아직까지 복원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서구 평리동 사직단은 영남의 중심 대구부(大邱府) 즉 달구벌의 대표 사직단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따라서 서둘러 복원되어야 함은 물론 제례도 전통에 맞게 시장(市長)이 주관하여 엄숙히 거행되어 역사적 의미를 살려야 한다.

더 바란다면 일대 거리를 사직로, 동명을 사직동, 아파트명을 사직아파트라고 하여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노력도 시도해 볼 만하다. 부산의 사직구장, 광주의 사직공원 등은 그곳이 과거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라 지어진 이름이다.

누군가 역사는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새로운 가치를 부여함으로 더욱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한다. 최근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서 자기 지역의 콘텐츠를 발굴하여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점은 서구라고 예외일 수 없다. 특히, 다른 구에 비교해 문화 자신이 다소 빈약한 서구로서는 사직단을 통해 구의 위상을 높일 좋은 기회다. 조선 시대의 유산이자 미신적인 요소가 있어 비과학적이라 하더라도 생명의 근원인 먹을거리, 삶의 터전인 토지의 중요성과 단체장이 지역주민의 복리 증진을 위해 힘써야 하는 책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사직단의 복원은 큰 의미가 있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