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김항회씨는 수집가에서 시작, 지금은 영남 유림들의 유묵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할 정도의 전문가가 됐다. |
|
|
|
|
▲ 김항회씨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유묵의 일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
|
|
|
|
▲ 화랑 내부의 화장실 모퉁이에 김항회씨의 소장품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변기 위 선반에도 아슬아슬하게 자료들이 놓여 있다. |
|
"자료수집을 하다 보니 반(半) 사학자나 마찬가집니다. 일단 모으고 보니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니 궁금해지더라고요."
수집가(蒐集家).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수집가를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재료를 찾아 모으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김항회(61)씨는 영남지역 유림들의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 수집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전문 수집가다. 36년째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그였기에 수집이 직업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긴 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유묵만 모은 것은 아니었다.
지난달 31일 오후 대구 중구 대구초교 인근에 있는 그의 화랑은 오래된 종이의 향과 그림이 품은 향 등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향이 뒤섞여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가 꺼내놓는 그간의 수집품들이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뭐, 이런 걸 다 모았나' 싶을 정도로 희한한 자료가 많았다. 하나씩 꺼내놓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탁자에 넘칠 정도가 됐다. 그러고도 "이만한 게 저 안에 가면 이만큼 더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내놓은 물품도 보통의 것은 아니었다. 구한말 고리대금업자의 장부에서부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자금 통장까지 금융계통 자료는 물론 1969년에 사용된 수기(手記)로 된 은행통장은 신상품(?)에 속했다. 심지어 화랑의 화장실에도 자료가 쌓여있을 정도였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별의별 자료 덕분에 그는 업계에서는 유명인사로 통했다. 독립기념관에는 수시로 자신이 갖고 있는 자료를 기증해 독립기념관 측에서도 '심심하면 자료를 내놓는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가 됐다.
일단 모았지만 결국은 나눔
-방대한 양인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이렇게 많이 모으셨습니까?
"필(Feel)이 꽂히는 게 있습니다. 이 물품은 나중에 보기 힘들 것 같다 싶으면 어김없이 손이 가요. 수집 생활만 40년 가까이 되니 이력이 난 게지요. 젊었을 때부터 책을 갖고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그 당시에는 다들 어려웠으니 배움의 길이 길지 못했지요. 하지만 책이 좋았어요. 책을 갖고 다니면 다른 책도 눈에 들어와요. 책을 갖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있잖아요. 맨 처음에는 책에서 시작된 겁니다. 점점 다른 곳에도 눈이 간 거고, 그러다 보니 가치 있는 물품이 내 눈에만 보였지요. 하나둘씩 그냥 모으기도 했다가 팔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밥 먹을 돈으로 물건을 바꿔 사고 좋아한 거죠."
-수집을 통해 희열이라는 걸 느끼십니까. 배고픔 뒤 찾아온 포만감 같은.
"밥 먹을 돈으로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정도면 말 다했지요. 많은 날은 아니어도 식구들이 달갑게 여기진 않았어요. 그나마 책을 주로 모아서 다행이었지요. 물론 그때는 모으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값도 쌌고… (그의 화랑에는 엘디 로렌스<Ld Lawrence>의 작품 등 눈에 띄는 작품들이 벽을 따라 걸려있었다. 일부 액자유리에는 오래전 걸레질한 자국이 박혀있기도 했다. 눈길을 작품에 맞추자 그는 얼른 말을 이었다.) 팔려고 걸어놓은 건 아닙니다. 물론 15~20년 전에 300만원씩 주고 산 것이니 1천만원 정도 주겠다고 하면 팔겠지요. 안 팔려도 상관없어요. 제가 그림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자식에 비하기엔 그렇지만 제겐 소중합니다."
-어렵게 모은 여러 소장품을 독립기념관 등에 기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귀중히 여기는 것들을 내놓기 쉽잖았을 듯한데요.
"제게 있던 유묵과 자료들은 단지 제 손을 거쳤을 뿐 원래 있던 자리로 간 겁니다. 유물이나 유품을 기증하는 것은 시대 정신을 세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입하는 데 돈도 꽤 들었지요. 지금 갖고 있는 것 중에도 가족들조차 모르는 게 많습니다.
고서적 등 유물에는 오랜 기간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저 '걸레가 다 된 오래된 책인데 고미술상에 팔면 얼마나 주려나'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유물을 바라보면 안 되지요. 그렇게 따지면 고서적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합니다. 그 안의 내용을 봐야지요. 내용을 보면 주옥 같은 선현들의 말씀이 녹아있습니다. 정신을 바로 하려면 이런 보물 같은 유물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합니다." (김씨는 1998년 석재<石齋> 서병오의 유묵을 모은 '석재시서화집' 발간을 주도해 책으로 펴냈다. 추사 이후 최고의 서화가로 꼽는 석재의 유묵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전국을 돌아다니며 석재의 작품을 사진으로 담고 자신이 작품을 구입하기도 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시작은 화랑 상인, 지금은 반(半) 사학자
-화랑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지금은 유묵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연히 일본인 화상(畵商)이 전한 미술연감이 인연이 됐습니다. 연감에 나온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화랑을 돌아다녔지요. 재미삼아 그림을 찾아다니다 보니 그림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습니다. 취미가 수집이다 보니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한 거였지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 모으기에 전념하기 시작했지요. 그 즈음 고서적도 시중에 많이 나돌았어요. 물론 돈이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공급이 많았던 터였지요. 가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싸게 샀던 걸로 기억해요. 이유가 있습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지요. '우리도 잘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정신적인 부분보다 물질적인 부분이 우선시되는 분위기였어요. 그때부터 고유물들이 싼 가격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일제강점기 때도 고이 간직하던 것들이었는데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면서 매물로 나온 것이죠. 또 집안의 가보처럼 여겨졌던 유묵들이 세대가 바뀌면서 쏟아져 나왔어요. 그때 외국사람들이 상당 부분을 사갈 수 있었어요." (지난달 30일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 박물관 100주년을 맞아 소장유물을 기증해온 인사들에게 헌정하는 242명의 기증명판을 세웠다. 이 중 미국인 등 외국인이 30명, 일본인도 22명이나 됐다.)
-요즘 들어 주식 투자보다 미술 투자가 낫다는 말이 팽배합니다. 마찬가지로 먼 훗날을 내다보면 고서적에 투자를 해 후손들에게 재산으로 남기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는 고서적 등을 모은 계기가 다릅니다. 제가 자료를 통해 공부를 하게 됐거든요. 어린 시절 배운 한자와 족보 등으로 풀이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됐어요. 더 공부를 하게 됐죠. 자료수집을 하다 보니 반(半)사학자가 다 됐습니다. 일단 모으고 보니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니 궁금해지더라고요. 지금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같습니다. 후손에게 재산으로 남길 의향이 없냐고 하시니까 답하기 곤란하네요. 글쎄요. 원래 이 물건들이 제 것이 아니긴 하지만… 제 아이들보다 '국가의 후손'들을 위해 귀하게 쓰인다면 또 내놓을 겁니다."
기증은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
-지난 3월 독립기념관이 추진하고 있는 '범국민 역사자료 모으기'의 첫 사례로 영남지역 독립운동가 7명의 친필 편지 등 67점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소수박물관에 4천여점, 대검찰청에 40여점, 그 외에도 독립기념관에 조금씩 기증한 게 있습니다. 기증한 이유는 어찌 보면 단순합니다. 국가가 솔선수범해 모은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모을 때는 어렵게 모았지만 지금까지 국가가 모은 자료가 너무 적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뿌리가 곳곳에 널려있는데도 그러질 못했어요. 저는 다만 국가가 하지 않았던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내놓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려면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 소장품을 자식이라고 생각해 보면 독립기념관이나 박물관 등에 시집보내야 합니다. 유물의 입장에서 봐도 그게 더 나은 길이거든요. 돈을 받고 판다면 물론 이익이 남겠지만 그때부터 그 유물이 갖고 있는 정신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부터는 '유물'이 아니라 '매물'이니까요."
-소장품들이 주로 영남지역 유림들의 유묵입니다. 지금도 주제를 잡고 모으고 있는 게 있으신가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로부터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퇴계 선생의 학파와 제자들이 곳곳에서 후학을 양성해 왔습니다. 이는 이웃 일본에서도 양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정도로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입니다. 제가 최근 들어 옛 편지를 중심으로 모으다 보니 시대를 관통하는 소재를 하나 찾긴 했습니다. 나중에 이걸로 책을 엮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아라' 등 요즘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내용과 흡사합니다. 먼 훗날 교육자료로도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봅니다."
-수집을 취미로 삼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요. 특별히 이런 주제로 접근해보라며 조언하고 싶은 게 있으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으로 돈이 될 것을 생각해 투자하는 걸 수집이라고 보는 경향이 최근 들어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돈되는 것을 좇으면 곤란합니다. 유혹이 강하겠지만 돈이 될 것을 좇는다면 가치가 없는 것에 큰돈을 투자하는 경우 헛다리 짚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수집은 투자가 맞긴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투자이지요. 수집은 모으는 사람에게 많은 깨우침과 가르침을 줍니다. 수집을 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생각, 이 원칙만 지킨다면 어떤 것을 수집하든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글·사진=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김항회는?=1949년 경북 의성 출생. 1973년 수집활동 시작. 1980년 화랑 개점. 한국독립운동자료총서 '독립운동가 서한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06), 영남선비들의 유묵, 첩(帖)이 되다(영주시·2008) 등 여러곳에 자료를 제공했다. 영남선유묵적(1996), 석재시서화집(1998) 등을 엮었다. 김항회 기증유물 특별전(소수박물관·2008.10~2009.8)을 열고 있다.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