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6년(영조 22)인악대사가 태어난 달성 인흥촌 지금의 달성군 화원읍 본리
1763년( 영조 39) 18살 때 친구들과 공부하러 갔다가 스님들의 정숙한 모습에 감동이 되어 머리를 깎은 용연사
영정과 비가 있는 천년고찰 동화사 대웅전
2003년 인악대사를 기리기 위해 대구광역시에서 명명한 안악대사나무
1808년(순조 8) 관찰사 김희순이 쓰고 세운 비각, 귀부가 봉황으로 되어 있다.
동화사 조사전, 가운데 가장 큰 영정이 동화사 개산조 극달화상 그 바로 오른 쪽이 인악대사 진영이다.
1796년( 정조 20) 스님이 입적한 용연사 말사 명적암 최근 크게 수리했다.
용연사 적멸보궁 경내에 있는 부도, 인악대사탑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계돌 종인이 화원본리에 설립한 비 (왼쪽으로부터 2번째가 인악대사비 )
성산이문이 배출한 조선후기의 고승
인악(仁嶽)대사
貞雄(33세 정언공파)
□들어가는 말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을 자랑한답시고 이고저곳 돌아다니면서 두서없이 쓴 글을 모아 낸 책이 <팔공산을 아십니까? (1993년 도서출판, 그루)>이다. 그런데 200년도 더 전에 비록 방법은 다르지만 팔공산 동화사에 머물며 탐욕으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불심을 편 선조(先祖)인악대사(1746~1796)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찮은 글로 시민의 마음을 사려고 했던 어리석음을 깨닫고 크게 부끄러워했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동화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따라서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거쳐 갔다. 그러나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떠났음에도 특이하게도 인악스님은 귀부(龜趺)가 봉황이자 1808년(순조 8)당시 지방의 최고 실권자인 관찰사 김희순(金羲淳, 1757~1821)이 짓고 쓴 비가 있을 뿐 아니라, <인악집>이란 문집을 남겼고, 조사전(祖師殿)에 개산조 극달화상의 지근에 스님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동화사를 찾아와 스님을 흠모(欽慕)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스님 오심은 한가로운 구름 무심히 피어남 / 스님 가심은 외로운 학 한 마리 긴 울음/ 위세와 힘으로 구필 수 없었고 /부귀로도 더럽힐 수 없으니 /뉘 알랴 나아가고 물러설 줄 아는 고결한 인품이 / 도리어 총림(叢林) 속에 있었던 것을 / 내가 와서 스님을 찾았더니 /구름 흩어지고 학은 묘연한 채 /오직 한 조각 그림만 남았으니 / 어찌 칠분(七分)이나 닮았으랴/ 아득한 저 허공 너머에서 마음으로 깨닫고 정신으로 만나리라.
이런 몇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조선 후기 불교가 핍박받던 시대에도 예외적으로 스님은 고위관료나,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 이문(李門)의 족보에는 없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이 사실을 일족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욕심으로 1997년 <나의 사랑 나의 자랑 대구>에서‘인악대사’라는, 2000년 <대구가 자랑스러운 12가지 이유>에서 ‘조선 최고의 문장가 인악스님’이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글을 썼고, 대구화수회에도 알렸으며, 2003년에는 동화사 경내에 있는 큰 느티나무를 골라‘인악대사나무’로 명명한 바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떻게 알았는지 인흥에서 계돌(季乭)종인이 찾아와 스님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기에 드렸다.
그 후 나는 다른 일로 이 문제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응와 이원조의 삶과 학문>이 뒤이어 <한주 이진상 연구>가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에서 간행되는 것을 보고 <인악집>은 물론 조선조 전기 대사간, 이조참의를 역임한 연담 이세인(1452~1516) 선조가 남긴 <연담집>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우 만농을 통해 대종회가 아니면 파종회에 건의하도록 했다. 사실 우리이문을 널리 알리는 방법은 사당과 재실을 잘 보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집을 번역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악대사의 생애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후범 전일주(田日周) 박사를 만났더니 책을 한 권 선물로 주는데 <인악집> 번역본이었다. 감격에 감격을 하며 고맙다고 했다. 이 소식을 아우에게 전하면서 다시 <연담집>이야기를 꺼냈더니 경대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종인이 개인적으로 번역해 보겠다고 하여 어쩌면 바라던 바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번역된 <인악집>을 배낭에 넣고 화원 본리로 향했다. 계돌 종인이 보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생각하니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런데 한 번 가본 기억으로는 도시 집을 찾지 못해 지나가는 마을 어른께 물었더니 추석 전 돌아가셨으며 가족은 시내로 나가고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불과 몇 달 만 더 살아계셨다면 스님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에 생전에 스님의 비를 세우겠다는 이야기를 들어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천수봉 아래를 가르쳐 주며 한 동안 애를 많이 먹었다고 했다. 현장을 찾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규모가 큰 것이 인악대사는 물론 한솔 효상, 선략(宣略)장군 인곤(仁坤), 통정대부 랑(琅) 무려 4기의 비석이 한 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하셨는지 문중의 도움을 받아 했는지 비용 또한 만만하지 않을 것 같았다.인악대사 비문은 동화사 김 감사가 쓴 것을 그대로 옮겨 적어 놓았다.
스님의 이름은 의첨(義沾)이요 법호는 인악(仁嶽)으로 고려 개국벽상공신대광사공(大匡司空) 성산부원군 이능일의 23 세손으로 달성 인흥에서 1746년(영조 22) 아버지 휘징(徽澄)과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에 태어났다.
여덟 살 때 향교에 들어가 <소학>을 읽었는데 그 뜻을 깊이 이해하였다. 재주가 이웃마을에까지 퍼졌을 뿐만 아니라, 품행도방정하여 고을 사람들이 도와주면서 혹시 대성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열다섯 살에 이르러 <시전> <서전> <주역>을 다 읽고 문장도 잘 지어 이름 난 선비가 되었다. 열여덟 살 때 동료들과 함께 인근에 있는 용연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엄숙한 분위기에 감동이 되어 가선헌(嘉善軒)공에게 출가하고 벽봉(碧峯)화상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벽봉스님은 그가 큰 그릇임을 알고 <금강경>과 <능엄경>을 가르치는 한 편으로 서악(西嶽), 추파(秋波), 농암(聾巖) 등 여러 대사의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23세 되던 해 비로소 벽봉화상의 후계자가 되었다.
계보로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사 임제로부터 34세이고, 임란 때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서산대사(西山大師)로부터 8세손이며, 상봉대사의 5세손이다. 그 후 다시 화엄종장 설파(雪坡, 1707~1791)화상을 찾아가 아우가 되기를 자청해 승낙을 받았다. 비슬산, 팔공산, 불영산 등 여러 곳의 사찰을 돌면서 불법을 펼쳤다. 스님은 배우는 사람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누구나 알기 쉽게 강의하여 당시 최고의 명강사로 통했으며, 유학에도 조예가 깊어 배우는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1790년(정조 14)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당(願堂)으로 수원에 용주사를 지으면서 주관할 이름 난 스님을 고르라고 하니 스님이 선발되었다. 스님께서 불상(佛像) 복장에 넣을 기원문을 지었는데 정조가 이 글을 보고‘어찌하여 스님이면서 이처럼 문장을 잘 하는 이가 있단 말인가 ’하고 격찬하며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스님에게 왕이 직접 선물을 준 사례는 사명당, 벽암 이후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1796년(정조 20) 당초 머리를 깎았던 용연사 말사 명적암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1세 법랍 34년이다. 부도는 같은 절 적멸보궁 왼쪽에 있다. 저서로 <화엄사기> <금강사기> <인악집> 등이 있다.
□스님의 시문
<인악집>은 제자 성안(聖岸)이 스님이 입적한 이듬해 편집 간행했다. 몇 부를 간행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현재 동화사와 몇 서울대학교도서관 등 몇 곳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 석학이었던 매산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서문과 우재악(禹載岳, 1734~1814)이 발문을 썼으며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는 절구와 율시 등 모두 77수가 수록되어 있고, 제2권에는 봉안문 1편, 소(疏) 4편, 축문 1편, 제문 1편, 서 1편, 기(記) 10편, 비문 1편, 유공록 2편, 상량문 4편, 제3권에는 서(書) 34편, 행장 1편이 수록 되어있다. 이번 번역에는 이들 이외에 김희순이 쓴 비문도 포함되어 명실 공히 인악대사가 남긴 글은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짧은 시 두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5월의 홍류동은 / 봄이 흐드러진 은사(隱士)의 집이라네. / 바위 끝 꽃은 볼수록 괴이하고 / 숲 속의 새소리는 들을수록 아름답네, / 산도 구름도 걸린 때가 좋고 / 개울은 돌이 많은 곳에 소용돌이 이네 / 신선이 멀지 않는 곳을 아노니 / 웃으며 산봉우리 안개 속에 들어가네.
-홍류동
하늘 높은 가을 들판 빛깔은 누르러 가는데 / 보이는 곳마다 가을바람에 벼 이삭이 향기롭네. / 우리들은 경술년에 이러한 풍경을 보노니 / 사람을 만날 때마다 태평시절의 임금이라 칭송한다네.
-가을 들판
□맺는 말
번역자(전일주 · 구본섭)는 서문에서‘인악스님은 동화사의 고승대덕으로 학문이 출중한 학승(學僧), 후학을 널리 지도한 강백(講伯), 많은 시문을 남긴 시승(詩僧)’이라고 격찬했을 뿐 아니라, ‘글 가운데 기문과 상량문은 주로 사찰 건립이나 중건에 관한 사실의 기록으로 영남일원의 사찰과 당우(堂宇)의 역사를 고증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했다.
지난 종보(제67호)에 소개 되었던 진주출신 청담(靑潭, 1902~1971)스님과 아울러 우리 성산이문은 자랑스럽게도 한국불교계에 우뚝한 두 분을 배출했다.
많은 종인들이 시간을 내 동화사 진영이 모셔져 있는 조사전에서 스님을 뵈옵고, 인악당에서 상서로운 새 봉황을 귀부로 만든 비와 명필이자 관찰사였던 김희순이 쓴 비문을 살펴보고,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한국불교를 위해 불꽃처럼 살다가 한 줌의 재로 남아 있는 용연사 적멸보궁 경내의 부도(浮屠)를 보면서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신을 추슬러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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