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컬럼

6·25…‘山 사람이여 보라!’

이정웅 2010. 6. 22. 05:38

6·25…‘山 사람이여 보라!’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미국에 대항하여 조선(북한)을 도와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자.

60년 전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중국 청년들에게 내려 보낸 징집 통지서의 구호다. 붉은 별과 망치가 그려져 있는 이 징집 통지서는 두 번째 큰 제목으로 ‘기쁜 소식’이란 뜻의 희보(喜報)라고 썼다.

‘북한을 돕기 위해 지원병으로 징집돼 가는 것을 더없이 영광스런 임무로 생각하고 기뻐할 것이며 사령부는 이를 경하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인해전술로 북한 남침을 지원한 공식적인 침략의 증거이기도 한 이 징집 통지서는 남의 동족 침략 전쟁을 돕는 일을 ‘기쁜 소식’이라 말하고 있다. 북한이 뿌린 포스터도 어린아이를 부둥켜안은 채 공포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미국기(旗)가 걸린 피 묻은 총검이 겨눠져 있다. 아래엔 ‘인민군 장병들이여 구원하여 달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다. 대조적으로 당시 미국에서는 자원 입대를 독려하는 포스터가 도시마다 나붙었다. 포스터의 제목은 ‘남아(男兒)로서의 사명’이었다. 우방을 돕고 침략을 저지하는 자원 입대를 ‘남자로서의 임무’라 말하고 있다.

또 다른 포스터, ‘지금 당신의 피를 헌혈하십시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간호사가 링거 병을 들고 서있는 뒤 배경에 폐허가 된 한국 전쟁터의 모습과 부상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 한 방울으로라도 침략당한 우방국을 돕자는 포스터다.

60년 전 6·25전쟁은 그렇게 정반대의 인식과 선전선동으로 시작됐었다. 그런 삐라들 중에 눈에 띄는 게 있다. 우리 국군이 6·25 전후 지리산 빨치산부대에 뿌린 ‘산(山) 사람이여 보라’는 제목의 삐라다. 오늘날 이런저런 연대 등 소수 친북좌파가 되새겨 볼 만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옮겨본다.

 

‘山 사람 여러분, 이치 없는 주장과 불가능한 목적 아래 단말마적인 농산(籠山)만 하고 있는 여러분, 굶고 헐벗고 산야를 헤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족을 위함인가? 가족을 위함인가? 또는 자손을 위함인가? 민족을 위한다면 동족상잔이 무슨 말이며 가족을 위한다면 헐벗고 굶주리는 그대의 가족들은 어찌 된 일인가. 이런 것이 자손을 위함이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대들의 그릇된 사상과 행동이 나라를 해(害)하며 민족을 상(傷)하게 하고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대들이여 뉘우쳐라. 새로이 온 세계의 승인을 받는 당당한 대한민국을 받들고 태극기 휘날리며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지 않으려는가. …’

 

나흘 후면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된다. 며칠 전 중국이 마침내 입을 열고 6·25전쟁이 남침이었음을 고백했다. 징집 통지를 희보(喜報)라 했던 중국이 남침을 인정하는 데 꼬박 6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이제 우리가 마음에 새길 것은 적(敵)으로부터 남침을 자백 받았다는 자족(自足)이 아니라 제2의 6`25전쟁은 과연 더 없을 것인가에 대한 경각심(警覺心)이어야 한다.

천안함이 맥없이 당하고 F-5 전투기는 몇 달 새 3대나 추락했다. 최고 군 수뇌부는 군의 취약점을 지적한 감사원에 볼멘소리로 저항하는 정신적 내분의 모습까지 보였다. 총체적 안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미래 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청소년세대는 6·25전쟁이 김정일 현재 통치자가 일으킨 것으로 알고(초교생 54%) 대학생의 49%가 전쟁 발발 연도도 모르고 있는 수준이다. 60년 전 삐라와 포스터에서 대비된 침략전쟁과 평화정신의 실상은 더더욱 까맣게 모를 것이다.

올 6·25 기념행사도 현충원과 국립묘지에 분향이 퍼지고 나면 다음 주말엔 여전히 행락 차량은 꼬리를 물 것이고 국회는 세종시 4대강 시비로 사생결단 싸울 게 뻔하다. 그런 물렁한 안보의식과 자중지란 속에 보수의 대단합, 특히 편중 이념에 빠진 진보의 이념 탈출이 없으면 제2의 비극은 또 한 번 올 수 있다. 60년 전 ‘山 사람 여러분!’이란 삐라를 굳이 길게 옮겨다 쓴 속뜻도 그래서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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