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산림벌채와 율부린너 가(家)
1세기 전 울릉도는 나무 천국이었다. 수종의 다양성은 차치하고라도 선박재나 가구재로 쓰일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불과 100년 만에 사라진 것은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의 짓이었다.
100여 년 전의 울릉도 산림현황을 검찰사 이규원의 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날
‘나무는 하늘을 가리고 숲길은 실같이 나있었다.’
둘째 날
‘왜선창에 이르니 전라도 낙안에 사는 선상(船商, 배를 만들어 파는 사람) 이경칠이 격졸 12명을 데리고 흥해군 초도에 사는 김근서가 격졸 19명을 데리고 배를 만들고 있었다.
닷새째 날
‘일본 제국 동해도, 혹은 남해도 혹은 산양도 사람입니다. 2년 전부터 벌목(伐木)을 시작하였으며, 금년 4월에 다시 와서 이곳에 와서 벌목을 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날
‘큰 고개를 하나 넘으니 노목(老木)이 하늘을 가리고 쌓인 낙엽이 무름까지 빠지며···’
이 일기를 통해 울릉도의 산림현황과 불법적으로 섬에 들어온 일본인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벌목, 또는 선박제조현황을 부분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그 많은 나무가 다 벌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울릉도의 산림이 급속도로 황폐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고종 대,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열강이 굶주린 이리 떼처럼 금광개발, 철도부설권 등 자국의 이익을 챙길 때와 일제강점기 일본이 자국의 중요한 건물의 재목을 울릉도에서 조달한데서 일어났다.
울릉도의 산림벌채권이 러시아에 넘어간 것은 일본이 국모 민비를 시해하고 고종 역시 신변의 위협을 느껴 보다 안전 곳을 찾아 아관파천(俄館播遷) 즉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와 집무실을 옮기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율브린너
1896년 고종이 러시아에 대해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산림벌채권을 주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 혜택을 받은 사람이 영화배우 율부린너의 할아버지였다.
벌채 기간은 20년이었고, 순이익금의 25%로를 조선조정에 납부하는 조건이었다. 이로써 울
릉도는 비록 우리나라 땅이었지만 산림은 남의 나라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율브린너가(家)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배경으로 명성을 높였다. 그러나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이 여순과 인천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격침시키며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이어 1904년 5월 18일 우리 조정에 압력을 행사해 대한제국과 러시아 간에 맺은 모든 조약을 폐기하도록 해 계약체결 8년만 중단했으므로 실제 러시아가 베어간 나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울릉도 산림 벌채가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급속도로 황폐해진 것 같다.
191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한 율부린너는 처음에는 서커스단의 곡예사였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던 중 미국에 정착 서양인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 태국 황제로 출연한 영화 ‘왕과 나’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십계, 황야의 7인 등에서 명연기를 펼치며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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