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광해군(태실)과 대구

이정웅 2012. 10. 23. 08:43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한 광해 왕이된 남자의 포스터

 광해군의 태가 문힌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위에서 본 발굴현장

발굴현장

태항아리(胎壺)를 넣어 두었던 태함

태지석과 태항아리(胎壺 보물 제1065호)소장처 < 용인대학교 박물관

 

광해군(태실)과 대구

 

2012년 가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고 제49회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남우주연상(이병헌), 감독상(추창민), 류승룡이 남우조연상(류승룡), 시나리오상(황조윤), 기획상(임상진), 촬영상(이태윤), 조명상(오승철), 편집상(남나영), 의상상(권유진, 임승희), 미술상(오흥석), 음악상(모그·김준성), 음향기술상(이상준), 영상기술상(정재훈) 등 모두 23개 부분 중에서 절반이 넘는 15개 부분을 수상해 우리 영화사상 또 하나의 금자탑을 쌓았다는 보도를 보면서 광해(光海)를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본디 왕재(王才)로 적합하지 못해 친 형인 임해군과 배다른 아우이자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가 다시 평민으로 강등시킨 패륜을 저질렀다고 하여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이 일으킨 “인조반정(1623년)”으로 폐위(廢位)되어, 강화도에서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67 세로 죽은 그를 소재로 한 이 영화가 이렇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을 두고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조선 광해군 8년, 독살 위기에 놓인 ‘광해’를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하게 된 천민 ‘하선’이 왕의 대역을 맡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실제 실록에서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광해군의 15일 간의 행적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창조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양면성으로 대표되는 왕 광해를 조명하는 데 있어 그의 대리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는 참신한 설정을 가미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한다. 하늘이 내린 임금이 천하를 호령하던 시대, 아무도 모르게 왕의 대역을 맡았던 천민이 있었다는 신선한 발상으로 기존 사극과는 다른 새로운 재미를 선사할 “광해, 왕이 된 남자”. 실제 역사와 상상력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를 통해 역사 뒤에 감춰진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을 담아낸 휴먼 픽션 드라마 “광해, 왕이 된 남자”는 2012년 가을, 진한 웃음과 감동으로 관객들을 강렬하게 사로잡을 것이다.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이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허구를 영화화한 것이다. 또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광해군이 비록 패륜을 저질렀지만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따라서 광해를 나쁜 왕으로 치부한 것은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들이 반정을 정당화하려는 음모라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는 중국 대륙이 명에서, 청으로 교체되는 혼란기를 맞아 오히려 가장 적절히 대처한 임금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피난(실제로는 도망?) 간 부왕 선조를 대신에 분조(分朝,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하기 위해 의주 쪽으로 피란 갈 때 왕자 광해군에게 본국에 남아 나라를 다스리는 왕명을 내렸는데 이때 만들어진 조정(朝廷))를 이끌며 전란 수습에 동분서주했다.

그가 왕위를 물려받은 조선은 전란으로 국토는 황폐해져 있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상태였다. 이를 즈음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명나라가 임란 때 우리를 도와주었으니 당연히 지원해야 하겠지만 난 중 수많은 사람들이 전사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군사를 내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명나라는 이미 쇠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를 도와주었다가는 새롭게 등장하는 후금의 미움을 살게 분명했다. 형편이 이러한데도 일부 신하들은 명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며 군사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광해는 강홍립을 대장으로 1만 여명의 군사를 명나라에 지원했다. 다만, 강홍립에게 밀명(密命)을 내려 싸우는 척 하다가 전세가 불리하면 항복하라고 했다.

이런 깊은 사정을 알 수 없는 신하들은 강홍립이 항복하자 배신자라며 그와 가족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신하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그에게 선물을 보내고 공신으로 치하했다. 이렇게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은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빠른 속도로 안정시켰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광해군이 폐위 당하지 않고 통치를 계속 했다면 이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폐위 명분은 명나라와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지키지 않는 것과 인목대비를 폐위 하고, 영창대군과 친형을 죽여 폐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3대 태종은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세자 방석과 이복동생 방번을 죽였고, 세조는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며, 연산군은 무오와 갑자사화를 통해 수많은 사림파와 문신들을 처형했다. 이런 점을 보면 광해군의 폐륜은 크게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하는 더 끔찍한 폐륜을 저질렀다. 또한 망해가는 명에 빌붙었다가 새로운 강국 청나라의 미움을 사서 야만족이라고 깔보던 태종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백성들을 다시 도탄에 빠트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달랐다.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1611년(광해군 3) 경작지를 넓혀 재원을 확보하였으며, 난중 불에서 타서 회의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을 중건하고, 일본과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다.

또,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 노력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이때 나왔다.

조선왕조 518년 역사에 왕은 모두 27명이었다. 그러나 태(胎)를 대구에 묻은 왕은 괭해군(1575~1641, 재위기간1608~1623 )이 유일하다. 그는 선조와 공빈 김씨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다. 부인은 폐비 유씨와 숙의 윤씨인데 윤씨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폐비 유씨가 아들 질(侄)을 낳았으나 강화도 유배 중에 자살하여 후손이 없다. 재위 기간은 15년 1개월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많은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아 재조명되고, 쿠데타로 물러날 만큼 무능한 왕이 아니라는 사실이 영화를 통해 속속 밝혀진다는 것은 정말 경사스러운 일이다.

대구시 북구 연경동 산 136-1번지 태봉에 있는 그의 태실(胎室)은 영화가 크게 화제를 불러일으킬 때까지도 방치되어 있었다. 또 영화를 즐기는 대구시민은 물론 당국조차 광해의 태실이 묻혀 있는 사실에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런 점은 영화 촬영장소나 관련시설을 관광자원화 하여 지역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 다른 자치단체들에 비해 너무 무관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범한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언론에 알리는 길 밖에 없었다.

매일신문의 이대현(현, 매일신문 논설위원)문화부장에게 제보하였더니 신선화 기자와 김태형 사진부장을 현장에 보냈다.

2012년 11월 6일 마침내 “광해군 태실, 비석 나뒹굴고 항아리는 사라져 ”라는 제목과 “북구 연경동 태봉산 보존 울타리·안내판 없고 석물 흉물스럽게 부서져”라는 부제로 보도 되었다. 이때, 사진부 김 부장은 흩어진 여러 석물 가운데 왕자경(王子慶) ` 용아지태실(龍阿只胎室)로 두 동강난 석물의 사진을 합성하여 왕자경룡아지태실(王子慶龍阿只胎室) 즉 광해군 태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했다. 경룡(慶龍)은 광해군의 유아일 때 이름이며, 아지(阿只)는 아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보도 이 후 어느 날 현장을 찾았더니 흩어진 석물을 두꺼운 비닐로 덮어둔 것 이외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8년 11월 9일 태실발굴조사 현장설명회가 열렸다.

태를 담은 항아리 즉 태호(胎壺)를 넣어 두었던 태함이 인상적이었다. 또 왕자가 태어나면 아기태실을 만들어 두었다가 그 왕자가 왕이 되면 다시 규모를 크게 하고 주변에 빗돌을 세우는 등 위엄 있게 정비하는 가봉태실(加封胎室)을 만든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아쉽게도 광해군 태실은 도굴되었다.

도굴된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백자 태항아리 및 태지석 (白磁 胎壺 및 胎誌石)"이라는 이름으로 1991년 1월, 25일 문화재(보물 제1065)호로 지정되어 현재 용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가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는 사이 도굴꾼의 손을 거쳐 어떠어떠한 세탁과정을 거쳐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태지석(태를 묻은 사람의 이름, 생년월일, 행적 등을 적어 태실에 묻는 돌)에는 “황명 만력 3년 4월 26일 묘시(卯時)생 왕자경룡아지씨태 만력 9년 4월 초 1일 계시(癸時) 장(藏)” 이라는 글씨를 새겨 놓아 왕자 경룡은 1575년 4월 26일 오전 5시~7시 사이에 태어났으며 1581년 4월 1일 오전 0시30분~1시 30분 사이에 태를 묻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거듭 하는 이야기지만 조선 27왕 중 대구에 태(胎)가 묻힌 왕은 광해군 한 사람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도굴되었음은 물론 그것이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귀중한 문화재였다는 사실이다. 이번 발굴조사를 토대로 북구청이 향후 복원하여 사적지로 지정할 것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부디 억울하게 폐주(廢主)가 된 그의 영혼이 위로 받을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모당 손처눌의 저서 <영모당선생문집>에 의하면 1609년 (광해군 1) 오봉 이호민과 선원 김상용(김상헌의 형)이 각기 태실상사(胎室上使)와 부사(副使)로 대구에 왔다고 하니 가봉태실은 광해가 즉위한 그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1차 아기태를 묻은 해는 1581년(선조 14)이고 왕위에 올라 2차 가봉태실을 조성한 해는 왕으로 즉위한 그해 1609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태봉 북쪽 도덕산 아래 안도덕이라는 마을이 있다. 한 때 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많이 났다고 한다. 즉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태실의 뾰족한 석물이 남자의 생식기(凸)를 닮은 형상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논의 끝에 석물이 보이지 않게 숲을 조성하자 멎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숲은 사라지고 없다.

태실이 파괴된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의 소행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