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카에서 본 여산,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자연유산이자 지질공원이다ㅣ
백록동쪽에서 본 여산
귀거래사의 주인공 도연명 묘 , 올라가는 계단은 그의 나이와 같이 63개로 만들어 졋다.
도연명 입상(부분)
기념관 내 귀래정
일행들과 기념촬영
비랑
백낙천이 머물렀다는 초당 앞에는 그의 동상과 연못이 있다.
펄벅이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집, 지금은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초 여행계확에 없어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산식물원 입구에서
삼첩천 폭포 ,이 폭포를 보지 아니하고는 여산을 다 보았다고 하지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주 소수서원의 모델인 백록동서원
우리나라 사람 조병준이 심은 계수나무 기념식수
주돈이의 애련설 작품이 탄생된 감당호와 연수정
무한의 황학루, 악양의 악양루와 함께 중국 3대 누각의 하나인 등왕각. 천재시인 왕발의 등왕각 서시의 무대이다.
강서성 여산(廬山) 기행
2016년 공자유적지 곡부와 맹자 유적지 맹부, 태산를 답사하고 2017년에는 황산과 주자(朱子)생가 주자 관련 유적지, 무이산, 무이구곡 등을 찾아보고 싸드로 한·중간 사이가 나빴던 그해는 쉬고 2019년 이번은 어디를 가느냐를 두고 이론이 있었다.
동료 중에는 중국 여행을 많이 한 분이 있어 중복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강서성의 세계자연유산이자 지질공원인 여산(廬山)을 제안해 채택되었다. 도연명사당-화경공원-금수곡-미려별서-여산박물관-여산식물원-삼첩천폭포-백록동서원-등왕각으로 정해 여행사에 보냈더니 한국여행객은 거의 없는 곳이라 한식 먹을 곳은 없으며 16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며 일정표가 도착했다. 돌아오는 도중에 상해 황포강유람과 외탄야경 감상이 추가된 이외 제안한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2019년 4월 16일 예정보다 2명이 적은 14명이 중국국적기 동방항공을 타고 12시 대구공항을 출발해 상해에 도착했다. 가이드와 미팅을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고 홍교역으로 이동 17시 45분 강서성 구강시(九江市)로 출발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평균 시속 250km로 달려 6시간 후인 23시경 도착해 24시 무렵 신화건국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1회용품을 안 쓰니 세면도구와 휴지는 별도 준비해야 한다는 여행사의 안내와 달리 면도기 이외는 다 제공되었으며 호텔은 청결했다.
첫째 날 (4월 17일)
날씨는 쾌청했다. 호텔 앞은 말로만 듣던 바다처럼 넓은 양자강이 유유히 흘렀다. 가로수가 난대 수종인 녹나무인 것이 이채로웠다. 이곳 사람들은 장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큰 화물선과 바지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침 8시에 출발해 도연명기념관에 닿았다. 현지 가이드가 위치를 몰라 명장 악비(岳飛) 어머니를 기리는 곳으로 가려다 방향을 바로잡았다. 경내는 묘소와 사당, 도연명 입상(立像), 귀래정, 유호(柳湖), 국원(菊園) 등이 있는 것 이외 소박(素朴)했다. 그의 작품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음주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진 문학성이 높은 작품이다. 특히,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게 낙향할 수 있는 용기를 닮고자 했다. 순창 신숙주 아우 신말주, 안동 석주 이상룡의 윗대 이굉의 귀래정은 그 뜻을 귀거래사에 부림홍씨 한밤마을 입향조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홍노는 낙향하며 집 주위에 버드나무 5그루를 심고, 칠곡 조병선은 그의 은거지로 지은 심원정을 음주 시에서 따왔다. 대구 달서구의 마을 도원동, 동구 평광동은 그의 도화원기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그러나 기념관의 규모가 작은 것을 보면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친숙한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이어 자리를 옮겨 케이블카를 타고 여산을 조망해 보고 하산하는 길에 당나라 시인 백낙천 머물렀다는 초당과 동상, 연못을 관람했다. 백낙천은 양귀비와 당 현종의 사랑을 애절하게 노래한 작품 “장한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그는 고향에서 향산을 사랑하여 향산구로회라는 시회를 조직했는데 그를 닮으려는 일단의 대구 선비들 역시 동구 도동 향산을 근거지로 향산구로회를 조직해 시회를 열어 풍류를 즐겼다.
비단에 수놓은 듯 눈부신 계곡이라는 뜻의 금수곡(錦繡谷)은 다양한 식물이 자생해 본초강목의 저자 이시진이 약초를 연구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면 한 승려가 금수곡의 큰 바위에 기대어 낮잠을 자다 꿈결에 코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향기에 잠이 깨어, 그 향기 짙은 꽃을 “수향화(睡香花: 자면서도 맡을 수 있는 향기의 꽃)”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후대에 사람들이 이 꽃을 길하고 상서롭다고 여겨 서향화라고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다고 하나 길이 험해 걷기에 자신 있는 몇 분만 참여하고 나머지는 수변 경관이 아름다운 호수 여금호 옆에 쉬었다. 다시 셔틀버스로 장개석과 송미령이 살았다는 미려별서(美麗別墅), 소설 『대지』로 미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이 선교사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는 펄벅기념관, 여산박물관을 둘러보고 산속에 있는 홀리데이웨이호텔에서 첫날의 답사를 마쳤다.
금수곡은 난코스라는 점에서, 펄벅기념관은 당초 계획에 입장료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관만 보고 온 점이 아쉬웠다. 향후 여산관광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참고했으면 한다. 호텔 역시 높은 여산에 있어 전망이 좋을 것이라는 예감과 달리 뒷동에 배정되어 앞이 가려 조망을 할 수 없었고 일출도 볼 수 없었다. 욕조가 없는 등 시설도 그냥 그랬다.
둘째 날(4월 18일)
아침 8시쯤 다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여산식물원을 찾았다. 산 전체가 세계자연유산이라 그런지 가는 도중 계속 울창한 숲이 전개되고 식물원도 숲이 우거진 것이 여느 식물원과 달랐다. 다만 관람로가 경사진 것이 걷기 힘들었다. 삼나무로 보이는 나무를 유삼(柳杉), 메타쉐콰이어를 수삼(水杉), 서부해당화를 수사해당(垂絲海棠), 금목서를 계화(桂花)라고 하는 이름표를 보고 식물원 조성에 기여한 인물들의 판을 만들어 소개해 놓은 이외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진 메타쉐콰이어 숲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군락을 이룬 것 등이 특이하나 나 이외는 나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하고 관람하고 삼첩천폭포로 향했다.
높이 215m로 세단으로 떨어지는 폭포로 여산에 와서 “삼첩천을 보지 않으면 여산이 오른 것이 아니다(不到三疊泉 不算廬山客)”라고 할 만큼 아름답고 웅장한 폭포라고 한다. 모노레일로 현장 들머리까지 갔으나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너무 가파르고 험해 등산전문가나 걷기에 자신 있는 사람들만 가능하다 하여 일행 14명 중 2명만 내려갔다 오고 나머지는 대기했다. 인터넷 자료만 보고 선정한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이어 주자가 5대 10국 시대에 서원의 전신인 여산국학(廬山國學)을 복원하여 서원으로 발전시킨 백록동서원으로 향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서원이자 이후 등장하는 모든 서원의 모델이 된 서원이다. 당(唐)나라 시절 이발(李渤)형제가 은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발은 흰 사슴 한 마리를 키웠는데, 종일 그를 따라다녔다고 하여, 백록선생(白鹿先生)이란 별칭이 있었다. 후에 이발이 구강(九江)의 자사(刺史)가 되고 나서 이곳을 꾸며 유명해졌다. 특히, 풍기군수 주세붕이 맨 처음 설립하고 훗날 퇴계에 의해 사액 된 소수서원(紹修書院)도 이 서원의 학규 등을 따랐다. 공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나 향교가 수용할 수 없었던 인재들을 길러낸 우리나라 사교육 발전에 전기가 된 서원이다.
서원 내에는 광서(光緖, 청나라 광서제 연호) 4년 즉 1878년, (우리나라 고종 15) 영남(嶺南) 조병준(曺秉濬)이 계화(桂花) 즉 계수나무를 심고 수식했다는 표석이 있어 그가 누구이며 무슨 연유로 이곳에 나무를 심고 빗돌까지 세웠는지 혹시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지 궁금하면서도 우리 조상들의 주자에 대한 경모가 어느 정도 깊었던지 우암 송시열은 주자학이 아니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다른 학문을 이단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발 마사지로 피로를 풀고 처음 묵었던 신화건국호텔에서 잦다.
셋째 날(4월 19일)
아침 구강시 내에 있는 호수 감당호에 있는 연수정(煙水亭)을 찾았다. 이곳은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 주유가 수군을 조련하여 유비와 함께 조조의 20만 대군을 패퇴시킨 적벽대전의 전초기지였다.
연수정은 북송 때의 학자 주돈이(周廉溪)가 아들 주수(周壽)에게 중수하게 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근년에 주유점장대(周楡占將臺)와 오현각(五賢閣)을 세워 도연명, 백낙천, 이발, 주돈이, 왕양명을 모셨다. 주돈이의 명문장 애련설(愛蓮說)의 발상지이다. 애련설은 다음과 같다.
“물과 육지에 나는 꽃 중에는 사랑할 만한 꽃이 매우 많다.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이(李)씨의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좋아하는 것이 성행하였다.
나는 유독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고, 속은 비었으나 밖은 곧으며, 덩굴치지 않고 가지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이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하거나 가지고 놀 수 없는 연꽃을 사랑한다.
내가 말하건대, 국화는 꽃 중에 속세를 피해 사는 자요, 모란은 꽃 중에 부귀한 자요, 연꽃은 꽃 중에 군자다운 자라고 할 수 있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로 들어본 일이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이는 나와 함께 할 자가 몇 사람인가?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마땅히 많을 것이다.-
감당호는 바다처럼 넓어 보였으나 아직 일러서 그런지 아예 심지 않았는지 연꽃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이어 강서성의 성도 남창의 등왕각으로 향했다. 어제까지의 맑았던 날씨와 달리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등왕각(滕王閣)은 무한의 황학루, 악양의 악양루와 함께 중국 3대 누각의 하나이자 당나라 천재 시인 왕발(王勃)의 등왕각 시서(詩序)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왕발이 베트남 북부지역 수령으로 좌천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꿈속에서 강신江神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등왕각을 중수한 낙성식이 있으니 참석해 글을 지어 이름을 내라” 하기에 왕발이 “여기서 남창까지는 7백 리인데 하룻밤에 당도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배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바람을 불어주리라.” 해서 왕발이 하룻밤 사이에 등왕각에 이르러 시와 서문을 지어 문명(文名)을 떨쳤다. 달성군 하빈면 낙동강 변 낙포 이종문의 아름다운 정자 하목정 이름은 왕발의 “등왕각 시서”에 따왔다.
“저녁놀은 짝 잃은 따오기와 나란히 떠 있고, 落霞與孤鶩齊飛(락하여고목제비)하고 / 가을 강물은 넓은 하늘과 한 색이다. 秋水共長天一色(추수공장천일색)”
등왕각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6층 전망대에 이르리 남창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관람을 마치고 남창역으로 이동 15시 53분 열차로 4시간,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우고 19시 41분 상해에 도착했다. 황포강유람과 외탄야경을 보기 위해 서둘렀으나 표를 구할 수 없어 주변에서 외탄의 화려한 야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마무리
여산은 기후가 온화하고 경관이 수려해 많은 시인 묵객이 찾는 중국의 명산이다. 도연명의 고향이자 이백, 소동파, 백거이 등 무려 1,500여 명이 4,000여 편의 시를 남긴 곳이고 펄벅의 명작 『대지』가 잉태된 곳이다. 특히, 진면목(眞面目) 즉 참모습이라는 말이 소동파가 여산을 유람(遊覽)하면서 쓴 시 “제서림벽(題西林壁)에서
횡간성령측성봉(橫着成嶺側成峰) 가로 보면 뻗어 간 고개요 옆으로 보면 솟은 봉우리 /원근고저각부동(遠近高低各不同) 멀리서 가까이서, 높고 낮은 곳에서 각각 다르구나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것은 / 지연신재차신중(只緣身在此山中) 이 몸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이겠지
또 높은 폭포를 일컫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은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 향로봉에 햇빛 비쳐 안개 어리고/ 遙看瀑布掛長川(요간폭포괘장천) 멀리에 폭포는 강을 매단 듯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물줄기 내리쏟아 길이 삼천 자 /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락구천)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가.
에서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여산은 중국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 서양사람들의 최고 휴양지로 1,000여 채의 별장이 지었는데 지금도 600여 채가 남아있는 곳이다.
은(殷)나라 시대에 광씨 성을 가진 일곱 형제가 여기에 오두막을 짓고 은거했는데 형제가 신선이 되어 승천하면서 남기고 간 오두막이 바로 지금의 여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구강(九江)시에서 남쪽으로 약 36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북으로 장강(長江), 남으로 파양호에 접해 비와 안개가 잦은 곳이라고 하나 이번 여행에는 너무 쾌청했다. 식물이 약 3, 000여 종, 조류 170여 종, 포유류 37종 이상으로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 기행은 비록 국적과 시대가 다르고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늘 작품을 통해 위안을 받고 우리 생활과 문화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도연명, 백낙천, 이백, 소동파, 주돈이 등 위대한 예술가들의 흔적을 돌아볼 기회를 가진 것은 큰 행운이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들조차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유적지가 서정주, 이육사, 유치환 등의 우리나라 작가들의 문학관에 비해 초라(?)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외면하는 데 비해 우리가 지나치게 미화, 흠모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우리 한국인들이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중국인들보다 오히려 한 차원 더 높은 데서 오는 괴리감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생전에 다시 가보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미리 더 공부하고 자료를 챙기지 못하고 시간을 충분히 잡지 못해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본 것과 특히, 도연명기념관에 조성된 국화밭을 살펴볼 기회를 잃어 한 포기쯤 훔쳐(?) 가져오지 못한 것이 깊은 후회로 남는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새로 여행계획을 짠다면 도연명기념관-케이블카-화경공원(백낙천초당)-펄벅겨념관-여산박물관-여산식물원-백록동서원-연수정-등왕각으로 하고 적어도 1곳에 1~2시간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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