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시선(詩仙) 백낙천(白樂天)과 강서성 여산의 도화(桃花)

이정웅 2019. 5. 2. 06:37


이태백, 두보와 더불어 당나라 3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시선(詩仙)으로 불린 백낙천이 여산에 머무렀다는 초당과 입상  




1930년 백낙천의 친필로 판명된 화경 즉 꽃길



작품 "대림사도화"의 소재가 된 도화(桃花) 즉 복숭아나무 버팀목이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도화,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복숭아나무와 유사하다. 개화 절정기를 지나 몇 송이만 남아 있다.


전통적인 복숭아나무와 달리 색이 더 붉고 겹꽃이라  그의 시(詩)소재 도화의 주제를 혼란하게 하고 있다.



시선(詩仙) 백낙천(白樂天)과 강서성 여산의 도화(桃花)

 

 

중국 강서성 구강의 여산(면적 302km2)은 높이가 1,474m, 연평균 기온이 17c로 기후가 온화할 뿐 아니라 경관이 수려해서 중국국립공원 (Lushan National Park)으로 지정되기도 하였지만 1996UNESCO 세계자연유산으로, 2004년에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었다.

식물 약 3,000, 조류 170여 종, 포유류 37종으로 생물 다양성도 높다. 특히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본디 그대로의 참모습를 일컫는 진면목(眞面目)이라는 말은 소동파(蘇東坡, 본명 蘇軾)가 이곳 여산에 와서 쓴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시의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 구절(句節)로부터, “높고 웅장한 폭포를 말하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역시 이태백(李太白, 본명 )의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성 이태백은 평생 5번이나 여산을 찾았고 14편의 시를 남겼으며, 동진 시대 전원시인 도연명은 평생을 이 산자락에서 묻혀 살았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문인 1,500여 명이 찾아와 4,000편의 시를 남긴 창작의 산실이다.

미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Pearl S. Buck) 역시 아버지가 선교사로 와 있던 이곳에서 수상직 대지집필했다. 그러나 상처도 안고 있으니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을 때 그들은 이곳을 최고 휴양지로 삼아 1,000여 채의 별장이 지었는데 지금도 600여 채가 남아있다. 중국 현대사에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니 모택동, 장개석 등 유력 인사들이 이곳에서 굵직굵직한 국가 중대사를 논의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은()나라 시대에 광씨 성을 가진 일곱 형제가 여기에 오두막을 짓고 은거했는데 형제가 신선이 되어 승천하면서 남기고 간 오두막이 바로 지금의 여산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구강시(九江市)에서 남쪽으로 약 36km 떨어져 있고, 북으로 양자강, 남으로 파양호에 접해 비와 안개가 잦은 곳이다. 이태백, 두보와 더불어 당나라 3대 시인의 한 사람인 백낙천(白樂天, 본명 居易, 772~846)의 흔적도 남아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인 그는 진사로 급제하여 출사했다. 교서랑을 거쳐 현위(縣尉)로 근무하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고 양귀비의 묘를 찾아가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이면서도 애달픈 사랑 이야기를 노래한 장한가(長恨歌)를 썼다. 한림학사, 좌습유로 승진했다. 간관(諫官)으로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위법이 있으면 직언하는 강직한 공복의 자세를 보였다.

재상 무원형이 절도사 이사도가 보낸 자객에게 입궐 중 피살되자 살해한 범인을 잡아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는 상소문을 여러 번 올렸다. 이로 인해 815년 이곳 강주(江州)의 사마로 좌천되어 6년을 보냈다. 이때 명작 비파행(琵琶行)을 짓기도 했다. 그는 임지(任地)의 여산을 좋아했는데. 어느 해 늦봄 대림사(大林寺)에 왔다가 작은 오솔길을 발견했다. 이 오솔길을 따라가 보니 복사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자 그 선경에 감동하여 "대림사도화(大林寺桃花)"라는 시를 지었고, 돌 위에 "화경(花徑 꽃길)" 두 글자를 새겼다. 1930년 이 석각이 발견되었다. 이후 일대를 공원처럼 꾸몄는데 그가 시를 지었다는 도화(桃花, 복숭아나무)는 최근 심었는지 버팀목이 남아있고, 종류도 홑꽃과 겹꽃이 섞여 있어 아쉬웠다. 초당과 그의 동상 그리고 작은 연못을 조성해 놓았으며 시문은 다음과 같다.

 

속세는 사월이라 꽃이 모두 졌는데 (人間四月芳菲盡) / 산사의 복숭아 꽃은 이제 활짝 피는구나. (山寺桃花始盛開) / 봄을 찾을 곳 없어 많이 원망했는데 (長恨春歸無覓處) / 이곳으로 옮겨 왔다는 것을 미처 몰랐네.( 不知轉入此中來)

 

멀리서 찾아온 나그네가 보기에는 이곳도 실망스럽기는 도연명 사당에서와 마찬가지였다. 문명에 비해 초라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화려하다 하여 작품이 더 높게 평가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누가 감히 그의 작품을 폄훼(貶毁)하겠는가? 외양은 결국 본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는 이태백이나 두보처럼 조선의 많은 문인의 존경을 받았지만 조선 후기 한반도의 남쪽 대구 선비들에게도 롤모델이었다. 그가 고향 하남성 신정현의 향산을 사랑하여 향산거사(香山居士)를 자호로 삼고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조직하여 만년을 보냈듯이 대구 선비들도 향산(도동 측백나무 숲,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제1호가 있는 산)을 매개로 같은 이름으로 1873(고종 10) 최운경, 채정식, 도윤곤, 곽종태, 최완술, 채준도, 곽치일, 서우곤, 서영곤 등 9명이 향산구로회를 조직하고 구로정을 지어 자연과 인생을 노래했다.

9세기 중국의 인물 백낙천이 1,000년이 지난 19세기, 공간적으로는 수만 리 떨어진 대구에서 환생하는 것을 보면 문학의 강한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