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황학루, 악양의 악양루와 더불어 중국 강남지역의 3대 누각의 하나 등왕각
등왕각서 라는 시를 써서 등왕각을 더욱 돋보이게 한 천재 시인 왕발상, 대구의 유명한 정자 하목정의 "하목(霞鶩)" 역시 왕발의 등왕각서에서 따온 이름이다.
등왕각에서 내려다 본 강서성 성도(省都) 남창시가지
대구에서 등왕각(滕王閣)을 그리워하다
도연명기념관, 금수곡, 백낙천초당, 삼첩천폭포, 여산식물원과 박물관, 미려별장, 백록동서원 등 여산 일대를 둘러보고 마지막 목적지를 등왕각(滕王閣)으로 선택했다.
등왕각은 무한의 황학루, 악양의 악양루와 더불어 중국 강남의 3대 누각의 하나이다. 그런데 왜 등왕각일까. 대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역만리 그것도 국내도 아니고 먼 중국 땅 강서성의 성도(省都) 남창에 있는 등왕각이 대구와 무슨 관계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하빈(河濱)의 낙포 이종문이 지은 하목정(霞鶩亭) 때문이다. 비록 대구시 유형문화재에 불과 하지만 특수한 건축기법은 보물급인 정자이다.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인조가 대군(大君) 시절 유숙했던 곳이고 이어 재위 중 정자 이름 하목당(霞鶩堂)을 친필로 써 준 정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중국의 천재 시인의 왕발(王勃)이 등왕각을 중수하고 베푼 연회에 참가해 쓴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 이름이 비롯되어 그곳이 어떤 곳일까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구강시 한 호텔 객실에서 본 중국 관영 TV 일기 예보에 다음 목적지 남창은 흐리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니 쾌청했다. 양지강과 파양호가 있는 구강은 흐린 날이 많아 작은 우산을 준비하라는 여행사(旅行社)에서 안내와 달리 여산일대를 둘러보는 2일 내내 쾌청했다. 마지막 일정도 쾌청하여 기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니 부슬비가 내려 거리에서 파는 우산을 2천 원에 샀다. 등왕각은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엘리베이트로 올라가 6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면서 관람하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중국문화에 익숙하지 아니하여 뭐가 뭔지 알지 못해 그냥 훑어볼 뿐이었다.
653년 당나라 고조 떼에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동생 등왕(滕王) 이원영(李元婴)이 홍주도독으로 있을 때 세웠다고 한다. 그 후 675년 도독으로 있던 염백서(阎伯屿)가 중수하고 빈객들을 청해 크게 잔치를 열었는데, 그때 왕발(王勃, 650~676)이 남쪽 교지국(交趾國, 베트남) 북부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다가 이곳에 들러서 시를 썼으니, 그 시가 등왕각서(滕王閣序)이다.
그는 산서성 하진현 용문 출생으로 수(隋)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며 시인 왕적(王績)의 조카이다. 일찍 글을 깨달은 천재로 6세 때 문장을 잘했으며, 17세 때인 666년 유소과(幽素科)에 급제했다. 젊어서 재능을 인정받아 664년에 조산랑(朝散郞)이 되어 왕족인 패왕(沛王) 현(賢)의 부름을 받고 그를 섬겼다. 그러나 고종 이치(李治)의 아들이 투계를 좋아하자, 이를 풍자하여 『격영왕계문(檄英王鷄文)』이란 글을 지었는데, 고종의 미움을 사 관직을 박탈당한 뒤 방랑하게 된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였다는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교지(交趾, 베트남) 북부의 영(令)으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畤)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던 중,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배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왕발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꿈속에서 강신(江神)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중수한 등왕각 낙성식이 있으니 참석해 글을 지어 이름을 내라” 하기에, 왕발이 “여기서 남창까지는 7백 리인데 하룻밤에 당도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배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바람을 불어주리라.” 하더란다. 과연 왕발은 하룻밤 사이에 등왕각에 이르러 등왕각서를 지어 문명(文名)을 떨쳤다. 대구의 아름다운 정자 하목정 이름은 이 왕발의 “등왕각서”에 따왔다.
저녁놀은 짝 잃은 따오기와 나란히 떠 있고, 落霞與孤鶩齊飛(낙하여고목제비)하고 /가을 강물은 넓은 하늘과 한색이다. 秋水共長天一色(추수공장천일색)이라.
왕발의 이러한 강신(江神)의 도움을 받은 행운(?)과 이에 대비되는 어느 가난한 선비의 불행을 『명심보감』에 소개되었다. 순명(順命) 편에 “시래풍송등왕각(時來風送騰王閣)”이요, 운거뢰굉천복(運去雷轟薦福碑)”구절이 있다. 즉 왕발처럼 운이 좋으면 순풍을 타고 먼 길을 가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지만, 운이 없으면 천복비(구양순이 쓴 비문의 탁본이 당시 비싸게 팔렸다)를 탁본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현지에 도착했지만 바로 그날 갑작스럽게 내려친 벼락으로 빗돌이 산산조각이 나서 헛수고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즉 인간의 운명이란 억지로 거슬릴 수 없다는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다.
여행이 늘 그렇지만 이번은 더 특별했다. 특히 평소 동경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전원생활을 대신해 자주 읽었던 귀거래사의 도연명 사당을 참배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 유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의 본보기인 백록동서원을 찾아 본 것과 그 영향이 이역만리 대구의 하목정에까지 이른 등왕각을 직접 오른 행운은 일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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