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잊혀진 화가 김용조

이정웅 2025. 3. 23. 12:00

김용조(金龍祚, 1916~1944)는 1930년대 대구는 물론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 이인성에 버금가는 화가였다. 이력도 비슷해 서동진이 경영하던 대구미술사 입사부터 선전, 일본 유학, 제전(帝展) 출품과 입, 특선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가로서 수업은 4살 많은 이인성의 응원과 협조가 컸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은 식민지 시대 유일한 화가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와 제전에 앞다투어 응모해 좋은 성적을 거둔 공통점도 있다.

 

좌로부터 김용조, 윤복진, 이인성

김용조는 1932년 선전(鮮展) 제11회부터, 13, 14, 15, 17, 18, 22, 23회 즉 8번 입선했으며 특히 14회<그림책을 보는 소녀>와 23회 <어머니상>으로 특선을 차지했다. 
1977년 대구시가 펴낸 달구벌『達句伐)』에는 대구가 낳은 인물 13명을 소개했다. 그중에 김용조도 당당히 포함되었다. (아마, 문학과 서예, 그림 부분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대구는 이들 이외 전백영, 서침, 양희지, 전경창, 서사원, 손처눌 등과 그 외 독립운동가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포함되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다.) 즉 조선시대 대문장가였던 서거정(徐居正)을 비롯해, 이윤재, 이상정, 상화, 상백, 상오 4형제와 박태원, 현제명, 이장희, 이인성, 김용조, 서병오(徐丙五, 1862~1935) 등이기에 더욱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처럼 김용조는 대구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선정되었고 <대구미술 100년 전(2000년)>”에 작품 “양파”가 <대구의 근대 미술전(2019년)>에 작품 “창주(이응창의 아호) 선생 상” “해경”이 소개되었지만 이후 화단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다. 
특히, 21세기는 문화가 곧 도시의 경쟁력이라고 하여 지자체마다 초호화(?)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어 다양한 장르의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콘텐츠를 작품화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점은 아쉬운데 김용조 화백의 소외도 마찬가지 사례일 수 있다.
그는 1916년 3월 16일 내당동 1222번지(현 두류동, 1207 번지)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로서는 거리가 꽤 먼 달성초등학교를 다녔다. 그가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가진 것을 알고 도와준 사람은 독립운동가 이시영(李始榮)의 외아들로 아동문학가인 창주(滄洲) 이응창(李應昌)이었다 그의 주선으로 당시 가난한 화가 지망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구미술사>에 압사해 평생 동지이자 형처럼 지낸 이인성을 만난다.

 

앞줄 좌측 첫 번째, 이인성, 둘째 김용조,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상화 시인


그는 천재 소년답게 19살 때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번째 낸 작품이 입선된다. 자신도 기뻐했지만, 선배, 친지들이 축하도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다니던 대구미술사를 그만두고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모델을 구하기는커녕 물감 살 돈도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그림 실력을 인정해 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던 은사 이응창을 찾아갔다. 딱한 사정을 들은 창주는 조양회관의 2층에 방 하나를 주며 화실(畫室)로 쓰도록 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한번은 설경(雪景)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화실 밖으로 옮겨 벽에 기대놓고 그림을 그리는데 바람이 불어 거의 다 완성 되어 가던 그림이 질펀한 땅에 떨어져 엉망이 되자 목 놓아 울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창주는 가난한 그를 위해 미혼인 처제(妻弟)를 모델로 소개해 주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양가의 처녀가 모델이 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여서 창주의 남다른 제자 사랑이 대구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그린 그림 <처녀상(處女像)>이 선전에서 특선했다. 
20호짜리인 이 작품은 흰 모시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처녀 좌상인데 모시 저고리 앞섶이 쪼그라져 약간 말려 올라간 것에 포인트를 두고 그린 작품이다.  
첫 출품에 입선하고 다음 해에는 특선하자 대구가 미술계가 들썩거렸다. 그는 조양회관을 나와 대구 최초의 백화점이자 예술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이근무가 경영하는 무영당(茂英堂)에 잠시 근무하다가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학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전쟁 중에 죽은 군인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며 밤에는 태평양미술학교에 다녔다. 이런 무리한 생활이 거듭되면서 당시 유행하든 폐병(肺病)에 걸렸다. 그러나 그는 몸을 돌보기는커녕 학업과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후의 남선(南鮮)>이 일본의 광풍회전(光風會展)에 입선되고, 1942년 50호짜리 <남선의 농가>가 자신이 그토록 꿈에 그렸고, 화가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제전(帝展)에 입선했다. 이로써 대구는 이인성과 더불어 제전출신 작가 두 명을 보유한 도시가 되었다.
3년 동안의 동경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사정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병세는 더 악화되었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도 붓을 놓지 아니하고 어머니를 모델로 또 하나의 대작 <어머니 상>을 그려 특선을 차지했다. 순금 메달과 상금이 주어졌으나 과로와 영양실조까지 겹쳐 동산병원에 입원했으나 28세로 요절했다.

참고문헌

달구벌(대구시 1977)
대구미술 100년 전(대구미술협회 2000)
대구의 근대 미술 (대구문화재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