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와 대구 문단

이정웅 2025. 4. 1. 11:48

고월 이장희(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상화와 고월(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박연(연못에 임하여서는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 즉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하라는 뜻 )

 

고월의 생가 지적도(현, 도로부지)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와 대구 문단

 

 

예향의 도시를 두고, 통영이다. 남도(南道)다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잣대로 평가하든 대구가 우리나라 제일의 예향(藝鄕)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모두 어려운 시기였고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한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기라성(綺羅星)과 같은 예술가들이 배출되어 각기 자기 영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예향이라고 하는 통영의 경우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김용익, 시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연극인 유치진 등이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장르별로 보면 음악과 문학, 연극 세 분야뿐이다.

그러나 대구는 다르다. 음악 현제명, 박태준, 그림 이인성, 김명조, 이쾌대, 서예(書藝) 서병호, 서동균, 소설가. 현진건, 시인 이상화. 이장희, 이육사, 연극홍해성, 영화감독 이규환 등이 있고 소설가 김동리는 계성학교 다니다가 서울로 갔고, 김원일, 김원우 형제도 비슷한 경우이며 박목월은 계성학교 재학 시 등단했다.

김춘수, 유치환은 고향이 통영이나 주로 대구에서 활동하며 대가(大家) 반열에 든 분들이다. 우리나라 최초 여류비행사 권기옥은 평양 출신 군인으로 이상정 장군의 부인이며, 박경원(朴敬元,1897~1933) 은 순수 민간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된 분들이다. 자동차도 귀한 시절 여자라는 신분상 제악을 극복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을 세운 분들이다.

대구가 어찌 자랑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이글에서는 동시대(同時代) 같은 시인으로 활동했던 이상화(李相和, 1901~1943)와 이장희(李章熙, 1900~1929)에 대해 특히, 이장희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인물의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특히, 작가의 시() 세게는 필자가 논할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월(古月)에 대한 이야기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대체로 상화(相和)는 민족시인으로 환영받는 데, 비해서 고월(古月)은 유력 친일자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평가가 낮고, 또한 42세로 상화의 생애도 짧았지만, 고월은 그보다 더 짧은 29세였으나 작품이 수적으로 적은 점도 원인 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두 분의 시비가 두류공원 인물 동산에 나란히 서 있어 대구가 낳은 국민시인 (?)을 기리는 모습은 보기 좋다.

고월(古月)1900년 이병학(李柄學)과 박금련(朴今連)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양희(樑熙)였으나, 1920년 장희(樟熙) 개명하였고 현재 불리는 장희(章熙)는 필명이다.

아버지는 서울 출신으로 궁내부 주사로 근무하다가 대구로 내려와 소금도매업 등으로 큰 부를 쌓았다. 이후 경영에 수완을 발휘하여 거듭 부를 축적하여 은행을 설립하는 데 참여하고 큰 저택을 가지면서 1909년 순종 황제가 대구에 왔을 때 궁중 고문관 등 수행원들의 숙소로 제공했다.

그는 서울 출신이지만 사교성이 남달랐든지 박중양, 서병조, 장직상 등 대구의 친일파들과 어울리면서 조선 총독부 자문기관인 충추원 참의(參議)까지 지냈다.

5살 때 모친을 여인 슬픔과 아버지가 재취(훗날 3취까지 했다) 부인을 얻는 등 가족 관계에 대한 불만으로 우울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대구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딴 사람처럼 학업 성적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지도력도 뛰어나 1912년 졸업할 때까지 여러 차례 급장도 하고 서예와 그림에 소질을 나타냈다고 한다.

1913년 일본에 유학 경도중학(京都中學)에 다녔다. 서구와 일본의 근대 시인들의 작품을 접하고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하며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대사 문학소녀 에이꼬(榮子)와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성적인 그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으나 그 애틋한 감정은 훗날 동경(憧憬)”이라는 시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는 기혼자였다. 아버지가 총독부 관리가 되길 권하고, 일인(日人)과 사이에 통역을 부탁했으나 거절하였다 이로써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용돈도 충분히 받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1923년 서울, 장사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부인이 서울에 올라와 애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별거하였다. 이듬해인 192424세 때 동향인이자 대구시민의 노래 작사가이기도 한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 1902~1967)의 권유로 금성 동인이 되어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마리” “불놀이”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5편과 톨스토이 번역 소설 영구한 귀향을 금성지 3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여러 잡지와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다가 1929113일 서성로 1103번에 본가 행랑채에서 음독자살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가족들이 화장하려는 것을 친구들의 항의로 50대의 인력거를 동원한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고 신암동 선영에 안정하였다. 그러나 묘비 하나 남기지 않아 지금은 그 유택을 아는 이가 없다.

비사교적인 성격으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양주동, 백기만, 오상순, 이상화, 현진건, 김영진, 변영로와는 가깝게 지냈다.

1130일부터 121일까지 양일간 유작 전시회와 추도회가 조양회관에서 개최되고 1951년 목우 백기만에 의해 시 11편이 수록된 상화와 고월이 간행되었다.

그 후 1996년 대구문인협회 (회장 여영택)에 의해 시 35편을 비롯하여 백기만의 상화(尙火)와 고월의 회상양주동의 낙월애상(落月哀想)”고월(古月)의 추억오상순의 고월(古月) 이장희군(李章熙君)”고월(古月)과 고양이윤장근의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의 생애(生涯)” 그 이외 고월 이장희 연보(年譜)” 등 고월의 거의 모든 것과 1900년대 한글학회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로 정리한 시집 봄은 고양이로다가 출판되었고 1996년 두류공원 인물 동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 회장과 당시 편집에 참가했던 분들이 정성이 책 속에 그대로 녹아 있어 새삼 존경스럽다.

20173, 20일부터 826일까지 대구문학관에서 대구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고월(古月)의 봄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개최되었으나 이후 그는 대구 문단에서 거의 주목 받지 못했다. 그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국내가 아니라, 국외 즉 미국이었다.

매일신문( 2005611일 자) 보도에 의하면 미국 알프레드 노프 출판사가 간행한 고양이를 주제로 한 세계 걸작 시선집 The Great Cat에 보들레르(프랑스)“Cat”, 폴 발레리(프랑스)“White Cat”, 릴케(오스트리아)“Black Cat”, 파블로 네루다(칠레)“From Cat” 등 세계 거장들의 작품과 함께 고월의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가 외교관 출신 시인 고창수(高昌洙)“The Spring is A Cat”로 영역한 시가 소개됨으로 세계적인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작가가 되었다.

고월의 시가 이 시선집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은 한림출판사가 1985년 한국과 미국에서 발간한 영역(英譯)시집 Best Loved Poems of Korea를 통해 미국 문단에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번역 시는 또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1999년 고양이를 소재로 삼은 세계 명화(名畫)와 함께 발간한 시화집(詩畫集)에도 실렸었다고 한다.

고월이 태어나고 목숨을 끊은 생가터는 우현서루를 운영하였던 상화의 큰아버지 이일우 저택(, 우현 하늘마당) 부근으로 최근 모 오피스텔이 들어섰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의 고뇌가 스며들었을 터의 일부가 남아 있다. 생가지를 알리는 표석 하나는 세울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라 가슴을 설레게 한다. 30여 년 전 여영택 회장이 그랬듯이 다시 대구문협이 나서야 할 것 같다.

 

참고문헌

달구벌(대구시 1977)

봄은 고양이로다 (대구문인협회 1996)

고월의 봄 (대구문학관, 2018)

씨족의 연원과 내력(인천이씨 대암공파 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