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의 소나무 (1999 10, 세계에서 가장 큰 헬기로 옮겨 심은 나무)
2007년과 대구
대구의 중요성을 정부차원에서 검토한 것은 신라 신문왕 때가 처음이 아니었던 가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서수도를 옮길 피요가 있었다. 당시 선택된 땅이 기름지고, 교통이 편리하며, 경관이 아름다운 대구였다.기득권층의 반발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어떻던 대구의 중요성을 신라의 집권층이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후 15세기 초 군(郡)으로 승격되기까지는 대구는 오늘날 최하위 행정단위인 읍(邑).면(面)에 해당하는 현(縣)에 불과했다. 세조 조에 와서 도호부로 승격되고,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경상도의 행정과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감영(監營)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그러나 이 역시 조선 8도 중의 1개 도(道)일 뿐 여느 도의 감영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구가 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고부터이다. 최근 일어났던 IMF사태에서 보았듯이 선조들은 이미 100년 전에 외채의 해악(害惡)을 깊이 인식하였으며 그 빚을 조세가 아닌 국민 성금으로 갚자는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사상 초유로 남녀노소, 어른과 아이 등, 성별과 연령, 신분의 귀천을 초월해 민족 전체가 참여한 구국운동(救國運動)이었다. 후에 일어난 3. 1운동은 국채보상운동이 그 모태(母胎)라고 생각된다. 당시 다른 지역사람들이 ‘다 같은 조선 사람이자, 나라사랑하는 마음도 같을 지언데 왜 우리가 이 운동을 주도하지 못하고 대구사람들에게 빼앗겼을까.’하고 후회했을 만큼 대구시민들의 자존심을 높이는 운동이었다.
내년은 이 운동이 일어난 100주년이 된다. 21세기의 첫해이자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어 대구발전의 밑거름이 된 400주년이 되는 2001년을 별다른 이벤트도 없이 아쉽게 보낸 것을 생각한다면 대구의 위상을 높인 2007년은 온 시민이 자축(自祝)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의 시정 참여가 시정의 요체(要諦)라면 시정부는 시민들의 결속력과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이 해를 의미 있게 활용하여 해야 할 것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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