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한국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느릅나무

이정웅 2006. 7. 23. 15:04

느릅나무

 

 

메디스 카운티의 지붕 덮인 다리

프렌체스카의 집

 

지붕 덮인 월정교 복원 모형도(안)

 

 

자유분방한 한 중년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트가 메디슨카운티라는  조그마한 시골에 있는 지붕 덮인 다리를 취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다리의 위치를 묻기 위해 한적한 시골의 한 농가를 방문한다. 그 집에는 한 때 문학교사로 활동하다가 자신의 꿈을 접고 남편의 농사일을 뒷바라지 하며 평범하게 지내는 프란채스카가 남편이 출타한 틈을 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뜻밖에 나타난 이 낯선 이방인에게 그녀는 길을 안내하는 친절을 베푼다. 때마침 남편은 귀가할 형편이 아니었고 이들은 이틈을 타 단 나흘간 짧지만 진한 사랑을 나눈다.

이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을 두고 만든 영화가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이다. 유부녀가 외간 남자를 사랑한 말하지만 흔하디흔한 이야기이자 사회적으로는 용납 안 될 불륜이다. 그러나 이런 금기된 사랑이 오히려 기혼자들을 대리만족(?)시켰는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러나 사실 다리를 주제로 한 러브스토리를 따지자면 그 원조는 우리나라다. 즉 한국판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라고 할 수 있는 지붕 덮인 다리는 무려 1,200여 년 전인 760년(제35대 경덕왕 19)에 이미 신라의 수도 경주에 건설되었던 것이다.

이 때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지가 100여 년이 지난 때이기 때문에 귀족 세력이 강대해진 것 이외 백성들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어느 때보다 평화로울 때였다. 야심만만했던 경덕왕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반월성 서쪽에 멋진 다리를 건설해 치적으로 삼으려고 월정교(月精橋)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왜 그렇다고 볼 수 있느냐하면 이즈음 만들어진 것들 중 신라문화의 정수라고라고 할 수 있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는데 당시 제상이던 김대성이 751년(경덕왕 10)에 짓기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에 완성한 불국사(사적 및 명승 제1호),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국보 제21호),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국보 제24호), 1966년 10월 석가탑 해체 과정에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국보 제126-6호) 등이 그러한 것들로 신라문화의 절정기였기 때문이다.

경덕왕은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왕권 강화와 불교중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고행정집행자를 중시에서 시중(侍中)으로 바꾸고, 유학교육에 힘쓰는 한편, 부패한 관리를 감찰하는 정찰(貞察)을 두는 등 중국식 제도를 본 받아 시행했으며 특히 9주, 5소경, 117군, 293현의 지명을 모두 한문식으로 바꾸었다. 이 행정구역 명칭 변경은 달구벌이 대구(大丘)로 표기되는 등 우리 고유의 지명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면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생명력은 끈질겨 오늘 날에도 많은 지명이 그대로 살아있다.

또한 충담스님에게 백성들이 편히 살도록 다스리는 안민가(安民歌)를 짓게 했는데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백성들 임금을 아버지라 여기며

그 신하는 우리를 사랑하실 어머니라 여깁니다.

우리들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이오니

임금과 그 신하들의 사랑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비록 구물대고 사는 중생이지만

우리를 먹여 다스리기만 한다면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렇게 하여야만 나라가 보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 분위기를 감안 할 때 월명교(사적 제457호) 역시 당시 가장 우수한 기술자들을 투입하여 건설된 다리이자 원효스님과 요석공주의 로맨스가 싹튼 곳이다.

원효(617~686)스님은 경산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신라의 고승이다. 그는 불교가 대중화되지 못하고 왕실이나 일부 귀족들의 독점물이 되는 것이 못 마땅해했다. 이를 타파하고 참다운 불교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거지차림으로 마을 어귀나 시장 등 서민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포교하였다고 한다. 그가 어느 날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지 않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라고 하고 돌아다니자 이 때 평소 스님을 눈여겨 보아오던 태종 무열왕이 시종을 시켜 스님을 모셔오게 하였다. 스님은 태종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부르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말짱한 모습으로 여자가 사는 곳을 찾는다는 것은 스님으로서도 쑥스러운 일이었다.

다리를 건너면서 일부러 물에 빠진다.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공주가 머무는 곳을 찾아 이 일로 요석공주와 원효 사이에 태어난 분이 설총이다.

그러나 자료를 검토해 보면 훤효스님의 생몰 년도가 월정교 건설 이전이 되어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돌로 만든 석교(石橋) 이전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는데 이 것을 760년 돌로 교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이 다리는 당시 왕실에서 신라인의 성지인 남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또 느릅나무로 만든 유교(楡橋)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어 이를 뒷받침 한다.    

경주시가 길이 63m, 폭 12m, 높이 12m의 월정교를 2010년 쯤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전설과 함께 고도 경주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