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 모형, 경상감영공원 내 현존하는 모조품 대구 유물로 외지로 반출된 문화재 중 하나이다. | ||||||||||
오는 19일은 발명의 날이다. 이날은 1957년 당시의 상공부 특허국이 역사학계의 자문을 거쳐 제정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측우기(測雨器)의 발명을 기리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
흔히 측우기는 세종 때의 과학자인 장영실의 발명품인 것처럼 이해되고 있으나,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얘기이다. <세종실록> 1441년 4월 29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분명히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 이것은 세종대왕이 왕세자가 직접 측우기를 만들어 실험한 일을 언급한 대목으로, 측우기에 관한 최초의 공식기록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측우기의 발명자는 왕세자 시절의 문종(文宗)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측우기는 과연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일까? 현존하는 측우기로는 보물 제561호로 지정된 ‘금영측우기’가 유일하다. 그나마 이것은 일찍이 일본으로 무단반출되었던 것을 1971년 6월에야 겨우 되돌려 받은 내력을 지녔다. 하지만 1910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는 최소한 다섯 군데 이상에 측우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구감영의 선화당 앞뜰에 놓여 있던 측우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영조시대에 만들어진 이 측우기는 아쉽게도 더 이상 제자리에 남아 있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인천관측소 소장을 지냈던 일본인 와다 유지(和田雄治)에 의해 이 측우기는 진작에 인천으로 옮겨졌던 탓이었다. 1910년 2월에 발행된 자료를 통해 와다는 “경상북도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이 자신에게 선사한 것으로, 지금은 인천관측소의 뜰에 있다”고 적었으며, 이 측우기의 크기에 대해 “깊이가 21.7센티미터, 안지름이 14.7센티미터”라는 측정치를 수록하였다. 그리고 이 당시 와다가 직접 촬영한 사진자료는 여러 자료를 통해 소개된 바도 있었다. 이와 아울러 1937년에 발간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이라는 자료에는 ‘총독부관측소’ 항목에 “인천관측소 뜰 앞에도 화강암제의 측우대가 있고, 측우기는 실내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대구감영의 측우기는 더 이상 행방을 알 수 없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는 통에 이 측우기가 분실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타의 측우기들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전부 사라지는 운명에 처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은 이 측우기의 받침돌인 측우대(測雨臺)만이 홀로 남아 서울 기상청 내에 보관되어 있으며, 보물 제842호로 지정된 이 측우대에는 ‘건륭 경인 오월조’라고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것은 영조시절인 1770년에 측우기가 다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측우기를 발명하고도 1971년에 간신히 되찾아온 ‘금영측우기’ 단 한 점으로 측우기 역사의 전부를 말해야 하는 것이 과학문화재 보존의 서글픈 현실이 아닌가 한다.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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