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고모령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정웅 2023. 9. 16. 15:43

0, 문제의 제기

 

1990722일 조선일보는 이 산하의 이 노래 (기자, 권혁종)” 라는 연재 기사 4번째로 비 내리는 고모령을 소개했다. 1946년 어느 날 노랫말을 지은 유호(兪湖, 1921~2019 예명 호동아)와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가수 현인(玄仁)이 밤을 새워 레코드 취입 작업을 했다. 한판 작업이 끝났다 싶을 즈음 한 곡이 모자랐다.

다급해진 유호는 마침 방에 있던 지도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곳이 고모(顧母)였다. 이름을 보는 순간 이별이라는 이미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단숨에 써 내려간 기사에 박시춘이 곡을 붙인 것이 비 내리는 고모령이다

현인 특유의 구수한 저음으로 발표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뒤 3.8선이 가로막힌 데다, 6. 25까지 겹쳐 숱한 사람이 고향을 등지게 되면서 가슴을 저미는 애창곡이 되었다. 권 기자는 이 노래의 현장을 찾았다. 고개는 대구와 경산을 잇는 지름길로 주민들은 고개가 팔()자 모양으로 생겨서 팔현(八峴)이라고도 하고,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우려던 한 어머니에 얽힌 전설에서 고모령(顧母嶺)으로도 불렀다. 또 권 기자는 팔현마을 토박이 이억조(李億祚) 씨에게 고모령전설을 들었다.

 

먼 옛날 이 마을에 일찍 남편을 여의고 어린 남매를 키우며 사는 홀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비록 가난했지만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안 받게 훌륭하게 키우려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된 그들의 끈기를 시험해 보려고 흙쌓기 내기를 시켰다.

해질 녘 내기를 끝내니 남동생의 흙더미가 낮았다. 부아가 난 남동생이 누나의 흙더미를 발로 뭉개고 마침내 싸움까지 벌였다. 실망한 어머니는 집을 나왔다. 자식들의 앞날 걱정, 남편에 대한 미안함으로 하염없이 걷던 그녀는 어느새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멀리 집을 내려다보며 펑펑 울었다. 그래서 고모령이 되었다. 고갯길 옆의 모봉(母峰), 형봉(兄峰), 제봉(弟峰)은 그때 남매가 쌓은 흙더미이고 그중에서 형봉(제봉)의 꼭대기만 평평한 것은 동생(오빠가)이 발로 뭉갠 것이다.”

(괄호 안의 글자는 필자가 현장과 맞게 고친 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 비 내리는 고모령은 고모(顧母)라는 지명을 빌렸을 뿐 고모령은 실재하지 아니하고아울러 어머니의 손을 놓고 --”로 시작하는 가사 역시 유호 개인의 머리에서 나온 창작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팔현과 고모령이 같다고 한 잘못도 저질렀다. 팔현(八峴)이 고개가 팔()자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도 잘 못이다. 사료에는 고개 근처에 살던 조선 초기 예조판서 전백영(全伯英, 1345~1412)이 심은 사제(私第)의 향나무가 팔자(八字)와 같이 기이하게 생겨 팔현(1993년 마을 사람들이 범죄없는 마을 빗돌을 세우며 비신의 한 면을 깎아 써 놓은 마을 유래에는 정숙영의 묘소의 향나무라고 했으나 정숙영은 전백영의 오기이다) 이라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캐가고 지금은 맹아(萌芽) 자란 것이 생존하고 있다. (우리고장 대구,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 1988)

 

고모령에 대한 기사(1990,7,22 조선일보)

 

역시 팔현마을에 살았던 조선 후기 성리학자 하시찬(夏時贊, 1750~1828)의 문집에는 파리 승()자 고개 현()자를 써서 파리고개승현(蠅峴)’이라 했다. 현재에도 대구-경산 간 주요 교통로로 활용 돠고 있지만, 고모령이라고 불린적은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현재 제2작전사령부 내에 고모령 표석을 설치한 것은 노래가 크게 유행하자 일부러 스토리텔링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경산지역의 전병견 향토사학자에 의하면 고모동을 비롯한 당시 경산, 고산지역 사람들의 대구 나들이는 주로 담티고개나 범물동 방면에 있었던 당고개(당현지 부근 堂峴池堂峴 즉 당고개 못이라는 뜻이다)와 팔현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주목해서 따져볼 사안은 이억조씨가 권 기자의 질문에 답변한 앞에 소개한 고모령의 전설이다. 이 전설의 원전(原典)은 대구시가 1982년에 펴낸 대구의 향기에 있다. 이 책의 형제봉 전설은 다음과 같으며 고모령과 관련성을 찾아 볼 수 없다.

 

0, 형제봉의 전설

 

2작전사령부 내에 두 개의 산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좀 뾰족하고 하나는 좀 평평한데 사람들은 이것을 형제봉이라 부른다. 이 두 봉우리 즉 형제봉이란 아름이 붙게 된 전설을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아득한 옛날 이곳에 힘센 장군 남녀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둘이 서로 산 쌓기 내기를 했다. 오빠는 옷섶으로 흙을 날라다 쌓기 시작했고 여동생은 치마폭으로 흙을 날라 산을 쌓기 시작했다. 내기의 방법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동안 누가 더 높은 산을 쌓는가 하는 것이었다.

흙을 담아 나르는 것의 크기가 오빠의 옷섶보다는 여동생의 치마폭이 훨씬 넓어 그런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려는데 누이동생의 산이 오빠 산보다 더 높이 올라간다.

심술이 난 오빠가 동생 산을 짓밟아버려 높던 누이동생의 산이 뭉뚱(뭉떵의 사투리) 해졌다. 그래서 끝이 뽀족한 산을 형봉(兄峰), 다른 밋밋한 산을 제봉(弟峰) 또는 매봉(妹峰) 이라 부르고 이 산 아래를 형제봉골, 또는 양지마을이라 부른다. 이 골짜기에서 남부주차장으로 나가는 계곡을 지장골이라 부르는데 옛날 이곳에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사가 있던 곳이라고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됐다.

, 지장골, 형제봉 일대를 통털어 뱀골이라 불렀으니 옛날 이 일대에 뱀이 많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현재 군부대 안에 있는 못 이름이 사동지(巳洞池)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전설 어디에도 어머니가 남매에게 실망하여 집을 나와 고갯마루에서 멀리 집을 내려다보며 펑펑 울었다는 내용이 없다. 그렇다면 없는 고모령의 전설이 어떻게 등장했을까 이는 비 내리는 고모령노래가 크게 유행하자 노래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없던 고개도 새로 이름을 붙이고 형제봉의 전설에다 어머니 이야기를 끌어드려 각색(脚色)한 것으로 보인다.

 

고모령의 또 다른 유래

 

 

동촌유원지에서 바라본 형제봉(왼쪽의 제봉또는 매봉, 오른쪽이 형봉),

 

수성문화원이 폐쇄된 고모역을 빌려 개관한 <고모역복합문화공간>에는 역무원이 쓰던 모자, 옷 등 소품부터 고모령에 대한 영화 프스터, 가수 현인 사진 등 많은 자료를 확보해 두었다. 그곳의 형봉, 제봉, 모봉, 그리고 고모령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적은 판을 게시해 놓았다. 그중에서 고모령에 대한 전설을 발췌해 보았다.

 

첫째, “일제 강점기 경산지역에 형제를 둔 홀어머니가 살았는데 아들들이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대구의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보고 싶어 대구형무소를 가서 면회하고 해 질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되돌아 오는 길에 아들이 있는 감옥쪽으로 자꾸만 되돌아보다가 이 고개 마루에 올라 여기를 넘으면 대구쪽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 황혼을 배경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들이 있는 곳을 보고 또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사연을 지역민이 이 고개를 고모령이라 했다.

 

둘째, ”옛날 남편을 잃고 두 형제를 키우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가난하게 살고 있던 이 가정에 찾아와 이 집이 못 사는 까닭은 전생에 덕을 쌓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 덕을 쌓으려면 주위의 흙을 쌓아 산을 만들라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들 형제가 흙을 쌓아 산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오늘날의 모봉, 형봉, 제봉등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산을 쌓는 과정에서 형과 동생이 지나치게 경쟁심을 가지는 바람에 서로 시샘을 하고 싸움까지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너무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집을 나와 버렸다.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 지금의 고모령인 산등성이에서 자식들이 사는 마을을 돌아보았는데 그 때 어머니가 자식을 몾앚어 돌아보았다는 뜻으로 고개 이름에 돌아 볼 고(), 어머니 모()라는 한자음을 붙여 고모령이라 했다.

 

첫째 이야기는 두 형제의 독립운동과 어머니 이야기이다. 그러나 고모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의 이름이나 아니면 성씨라도 전해 올것인 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을 보면 허구일 가능성이 크고 둘째는 역시 대구의 향기의 형제봉 전설의 변형된 형태로 볼 수 밖에 없다. 위 내용을 종합해 보면 처음부터 고모령도 고모령에 관한 전설도 없다.

 

고모동의 유래

 

작사가 유호는 고모(顧母)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보고 거기에다가 영()을 덧붙여 노래 제목을 고모령(顧母嶺)”이라 하고 가사는 그의 생각대로 작사했다.

그렇다면 고모라는 지명의 유래는 무엇인가 수성구문화원이 수집해 <고모역복합문화공간>에 게시해 놓은 고모(顧母)의 유래는 3가지였다.

 

첫째, 고모역은 일제 강점기에 징병과 징용에 끌려가는 자식과 어머니가 생이별하는 장소였다. 당시 증기 기관차는 경사를 이룬 고모령을 단번에 올라가지 못하고, 더디게 고개를 넘어갔는데 이때 아들의 얼글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모여든 어머니들로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둘째, 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사는 두 남매가 있었다. 어느날 스님에게 전생의 공덕이 모자라 가난을 벗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가족은 산을 하나씩 만들어 덕을 쌓기로 했다. 하루종일 쌓은 산을 비교하여보니 오빠가 쌓은 산이 가장 낮았다. 이것을 본 오빠는 시기심에 여동생이 쌓은 산을 바로 뭉개버렸다. 고모령에는 형봉, 제봉, 모봉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매봉의 봉우리가 밋밋한 사연이 이에 연유한다. 남매가 시기하고 다투는 것에 실망한 어머니는 두고 집을 떠났다. 떠나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바라본 것이 고모령이다.

 

고모령 노래비(1991,10, 17)

 

셋째. 옛날 이 마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지만, 금실(琴瑟)이 좋은 부부가 예쁜 사내아이 하나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자 효심이 지극한 부부는 정성을 다해 간병했으나 좀처럼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때 마침 탁발을 하러 온 스님이 아이를 삶아 어머니께 드리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고민에 빠진 부부는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으되 어머니는 한 번 돌아가시면 평생다시 볼 수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마침내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하고 큰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기다렸다가 밖에서 놀다 오는 아이를 안고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으려는 찰나 아이가 힐끗 어미를 돌아보았으나 솥뚜껑을 닫고 한동안 멍한 마음으로 계속 불을 지피고 있는데 조금 전 가마솥에 넣었던 아이가 엄마하면서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자 깜짝 놀란 어미가 아이를 부등켜안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더니 한결같이 조금 전 솥에 넣은 아이는 부부의 지극한 효심에 탄복한 하늘이 보낸 산삼이 천년을 묵어 아이로 환생한 동삼(童參)이라고 했다. 돌아볼 고() 어미 모()는 동삼이 가마솥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를 돌아본 데서 유래되었다.

 

고모역은 경부선이 1905년 개설된 데 비해 20년 늦은 1925년에 개설되었다. 한적한 시골이지만 징병이나 징용대상자가 있을 수 있으며 기치를 탓을 수 있고 떠나는 아들을 보려는 어머니가 있었겠지만,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만큼 많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또 전국의 다른 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상당한 과장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롸할 수 없고, 둘째 유래 역시 대구시의 자료 형제봉의 전설이 부풀린 내용으로 보인 반면에 셋째 전설이 고모의 유래로 가장 타당성이 높다. 몇 년 전 필지도 같은 내용의 전설을 주민 한() 모씨로부터 채록했다. 고모(顧母)의 뜻은 어미가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를 돌아 본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미가 마을이나 아들을 돌아본다는 다른 이야기는 자구 해석의 오류이다.

 

맺는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모에는 고모령고모령의 전설도 없다. 다만 고모동의 유래만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전설은 주민 한모씨가 말한 세 번째 동삼(童參)이야가가 사리에 가장 근접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은 대구를 대상으로 한 국민애창곡(?)이다. 어느 지역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일은 그 지역의 경쟁력과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따라서 각 자치단체는 앞다투어 지역을 소재로 한 노래를 일부러 만들거나, 인기 연속극과 영화촬영장을 유치하고 있다.

대구도 예외가 아니어서 길옥윤 작곡가에게 의뢰해 패티킴이 부른 대구의 찬가(능금꽃 피는 내고향)”를 만들고 노래비도 세웠다. 이런 점에서 유호가 가사를 쓰고 박시춘 작곡하여 가수 현인이 불렀던 비 내리는 고모령은 지극히 우연히 탄생한 대구를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비록 고모령이 없고, 고모령의 전설이 없더라도 노래의 탄생이 우리 지역의 고모(顧母)인만큼 거기에 스토리 스토링텔링을 더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억지로 일제강점기에 장병이나 징용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팔현의 유래를 낳은 향나무의 맹아(萌芽木)

 

비 내리는 고모령은 우리지역의 중요한 무형 문화자산이다. 보다 과감하게 고모령을 알렸으면 한다. 고모령가요제도 더욱 활성화하고, 고모역에서 제봉(弟峰)까지를 고모령길로 명명하고, 만촌동의 고모령노래비를 고모마을 입구로 옮기고, 2작전사령부 내에 있는 고모령 표지석을 시민이 볼 수 있도록 제봉으로 이설하고, 고령길 어느 곳에 가사에 등장하는 물레방아도 만들고, 여기에 더해 아이를 가마솥에 넣는 동삼 이야기를 형상화한 조형물을 고모령길 입구에 어느 곳에 세우고 효() 사상의 교육장으로 활용했으면 좋을 것 같다.

 

'대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거천과 참게  (1) 2024.01.08
대구에 청룡이 살았다.  (1) 2023.12.30
농수산물도매시장 이전 유감  (2) 2023.05.04
재일교포가 기증한 두류공원 벚꽃  (0) 2023.03.24
서문시장 이전 100년  (1) 2023.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