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꽃과 숲

이정웅 2010. 3. 17. 20:55

 

 

꽃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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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일본 도쿄 대로변 화단의 꽃봉오리 몇 송이가 잘려 나가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NHK 9시뉴스가 머리뉴스로 다룬 것을 보았다. 황금시간대 간판 뉴스 프로에서 이렇게 사소한 것도 크게 다루나 싶어 의아했다. 몇 분간 뉴스 진행을 따라가면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적어도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라면 질색하고 정해진 규율을 지키는 데 강박관념을 가진 일본 사회라면 이런 것도 이슈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속보가 나왔다. 멀쩡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무슨 불만에선지 우산대로 꽃봉오리를 후려치고 지나가는 모습을 담은 폐쇄회로 TV 장면을 방송했다. 짐작건대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도 바로잡지 않고 방치하면 더 큰 무질서를 부르고 결국 전체의 조화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경계였다. 마치 바퀴의 살이 하나씩 부러져 나가면 바퀴 전체가 위험에 처하듯 말이다. 일본이라는 사회를 지탱해 가는 기본틀인 ‘세켄’(世間`조직이나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규범이나 인간관계)에 벗어나는 잘못된 행동의 한 사례로 지적한 것이다.

경제 침체로 일본 국민들의 무력감이 더해가면서 이목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늘고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않는 일이 부쩍 많아져 걱정이라는 현지 언론 보도를 종종 접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단순히 개인의 일로 그냥 넘겨 버리기 일쑤지만 일본에서는 사회 전체의 일로 치부해 고발하고 따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같은 의식의 차이는 두 나라의 땅 색깔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반도와 일본의 위성 사진을 구글어스로 검색해 보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짙은 녹음의 차이다. 강원도 일대만 녹음이 우거진 우리와 일부 대도시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토가 녹색인 일본 열도는 분명히 구별됐다.

작고한 SK그룹 최종현 전 회장이 어제 산림청으로부터 ‘숲의 명예전당’ 헌정자로 선정됐다고 한다. 생전 그는 민둥산에 나무를 심어 아름드리 목재로 자라면 장학금으로 쓰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나라 사랑하는 사람이 심는 거야”라는 말에서 최 전 회장의 진짜 의중이 읽혀진다. 나무나 꽃, 돌멩이 하나도 아무렇게나 대할 단순한 사물로만 보지 않고 지켜야 할 규범으로 인식하는 일본, 나무를 나라사랑의 방법으로 본 최 전 회장의 시각에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나무와 꽃에서 개인보다 전체를 생각하는 근본은 다르지 않다.

 

매일신문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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